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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뮤직 붐이 거품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 같아서 자제하고 있지만, 그래도 굳이 따져본다면 이전의 재즈 붐보다는 훨씬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범위를 좁혀 남미 지역의 음악과 문화를 생각하게 되면 현재 대중문화계의 최대 '화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팝음악계는 라틴이 평정한 지 오래이고, 국내에서도 월드 뮤직 편집음반과 수입 음반의 연이은 성공, 체 게바라 평전 등의 히트 등으로 잔뜩 고무된 상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남미 지역의 음악과 문화에 대한 관심과 수요는 이전부터 '포화' 상태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아니, 더욱 더 정확히 말하면 아주 오래 전부터 남미 지역 문화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간단한 예로 흔히 카바레 음악으로 일컬어지는 룸바나 차차차 등은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북한과 더불어 2대 적성국이라는 쿠바에서 건너온 문화이다. 그뿐 아니라 익숙한 음악 스타일인 살사나 맘보, 삼바 등도 죄다 남미 지역에서 건너온 음악 유형임을 상기한다면, 근래의 월드 뮤직 붐은 단순히 원래부터 가까이에 존재하던 것을 수면 위로 부상시킨 현상에 다름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남미 열풍에 편승해서 근래 온갖 종류의 서적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가운데,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책은 단연 주목할 만하다. 전통과 역사의 '창작과 비평사'의 이름을 달고 나와서 하는 소리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특정 경향이나 사상에 감염되지 않은 중도적인 입장의 필자가 체험에 기초해서 남미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떤 사상적 조류나 남미의 생활 방식 따위를 '찬미'하며 읽는 이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현대 세계에서 소외당한(혹은 소외당한 것처럼 보이는) 네 국가를 방문해서 보고 듣고 느낀 일, 각각 나라의 역사와 예술에 관한 '사실 그대로의 전달'을 모토로 삼는다. 그래서인지 책을 넘기는 일이 고되거나 혼란스럽지 않다. 제목 그대로 '배를 타고' 순례하는 듯한 느낌의, 부담스럽지 않은 문화기행서이다.
내용 가운데서 미국의 패권주의-제국주의에 쿠바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사실적으로 기술한 부분은 이 책의 격을 높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기아에 시달린 쿠바 국민들의 증언, 카스트로에 대한 열광적 지지와 증오, 미국의 남미 국가 정치에 대한 부적절한 개입 등은 현재 '악의 축' 발언 등과 관련된 미국의 행보와 맞물려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쿠바 길거리에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연주를 잘 하는 노인들이 많더라는 일화도 재미있고, 페루의 종교 관습과 토속 신앙에 대한 부분도 흥미를 자아낸다. 또한 직접 발로 뛰며 겪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는 남미의 문학-역사-음악-미술에 대한 상세하고 '현재진행형'인 진술은 근래의 여타 남미 관련 서적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가보지도 못한 주제에 남의 이야기를 토대로 쓴 서적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던가.
그런데 이처럼 음악이 강물처럼 흐르고, 고유하며 독창적인 문화를 지닌, 유구하고 힘겨운 역사를 지닌 이들의 이야기에 왜 우리는 이제서야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일까. 이들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텐데. 어쩌면 우리는 알고 있는 몇몇 '세계' 이외에는 주의를 기울일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 우리가 무언가 '다른' 것에 대해 알아볼 기회를 '누군가'가 원천적으로 막고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누군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속고 살아왔다'는 느낌이 치솟는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곳들에 가봐야겠다는 다짐만 굳게 하고 만다. 여기엔 없는 무언가 아주 다른 것이 있으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쯤에는 그 '아주 다른' 것을 발견한 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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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이성형 지음, 창비(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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