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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성애자를 차별하지 않아요." 퍼레이드 출발에 앞서 참가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멈추지마! 지금부터야 두근두근!"
게이도 레즈비언도 트랜스젠더도 그리고 이성애자도 모두 하나였다. 6월8일 오후 서울 이태원거리는 말그대로 동성애자들과 이성애자들이 편견없이 어우러진 '작은 해방구'였다. 4일부터 시작된 동성애자 퀴어문화축제 '무지개2002'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거리 퍼레이드, 그 2시간에 걸친 축제의 장으로 초대한다.

'성적 편견' 뛰어넘은 한바탕 축제의 장

이반들의 축제, 퀴어페스티벌

동성애자들이 거리 퍼레이드를 벌이는 건 외국에선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 최대의 동성애자 축제 '시드니 마디그라 페스티벌'은 호주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으로 떠올랐고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가며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2년전 처음 시작된 국내 동성애자들의 축제 '무지개2002'는 올해로 세 번째. 외국에 비해 폐쇄적인 성문화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선 동성애에 대한 개념 자체가 희박한데다 동성애자를 무작정 혐오하고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퀴어 페스티벌은 동성애자들 스스로 자긍심을 갖는 한편 사회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성애자들에게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동성애자들의 행사지만 자원봉사 등을 통한 이성애자들의 참여가 유독 많은 것도 그런 이유.

지난 4일 영화제와 전시회로 출발한 올해 퀴어문화축제는 7일 동성애문제 전문가인 더글라스 샌더스 교수 초청 강연에 이어 이날 거리 퍼레이드를 마지막으로 끝맺음했다. 사진 전시회는 지하철5호선 광화문역 전시장에서 11일까지 계속된다. /김시연 기자
월드컵 특수 덕분인지 서울 이태원거리는 평소보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특히 이태원 우체국 앞에 마련된 특설무대에서는 낮부터 한국 고전무용과 외국 민속공연단의 춤사위과 계속 이어지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었다.

"퍼레이드 참가자 가운데 붉은 띠를 두른 사람의 얼굴은 촬영해서는 안됩니다."
취재팀이 이날 퍼레이드 운영본부로 사용되고 있는 이태원의 한 카페에 도착한 건 오후 2시경. 퍼레이드를 3시간이나 앞두고 있었지만 카페에는 퍼레이드를 준비중인 자원봉사자들과 참가자들로 분주했다. 주최측은 미리 언론사 기자들을 모아놓고 사진촬영 문제에 대해 신신당부했다.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동성애자들에게 언론을 통해 신상이 공개되는 것은 그만큼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후 4시경 퍼레이드 시간이 가까워오자 카페 안이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준비한 의상을 서둘러 갈아입고 서로의 얼굴을 분장해주는 장면은 패션쇼 무대 뒤편을 방불케 했다. 화려한 금관을 쓴 임금과 하얀 날개를 단 천사, 검은 복면을 한 쾌걸 조로에서 깜찍한 아랍 공주까지. 이들의 파격적인 의상과 짙은 화장은 카페 밖을 나서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외국인 관광객과 시민들의 엇갈린 반응

▲퍼레이드에 등장한 대규모 무지개 깃발 ⓒ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오후 5시경 게이 연예인 홍석천씨의 개막 선언에 이은 짧은 개막식이 끝나자 다양한 성적 지향을 상징하는 대형 무지개 깃발을 앞세운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이날 거리 퍼레이드 참가자는 지난해 행사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400여 명. 이들은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앞에서 시작해 이태원 해밀턴호텔 앞까지 1차선 도로를 한바퀴 돌아오는 형식으로 30여 분에 걸쳐 행진했다.

게이 드랙퀸(여장 게이) 행렬을 선두로 레즈비언 풍물패, 대형 무지개깃발이 선두에 나섰고 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단체 '끼리끼리', 서울대 동성애 인권동아리 '마음006', 연세대 동성애인권동아리 '컴투게더' 등 동성애자 단체 소속 회원들이 저마다 깃발을 들고 뒤를 이었다. 주한 외국인 레즈비언모임 '사포'에서도 수십 명의 회원이 참석해 행렬의 한 부분을 차지했고 수백 명의 개별 참가자들이 뒤를 이었다.

▲ 퍼레이드에 참가한 주한외국인 레즈비언 모임 '사포' 회원들 ⓒ 오마이뉴스 김시연

특히 행인들의 눈길을 잡아끈 건 역동적인 댄스뮤직에 맞춰 현란한 춤을 보여준 친구사이 스포츠댄스팀. 그들은 주변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들의 끼를 마음껏 발산해 외국인 관광객들의 큰 환호와 박수를 이끌어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즉석에서 얼굴에 분장까지 하고 퍼레이드 행렬에 뛰어드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한국 상인이나 시민들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이들은 갑자기 벌어진 낯선 광경에 한편으론 신기하고 흥겨워하면서도 난처해하고 동성애자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행사는 재밌지만 동성애자는 싫다?

▲ 퍼레이드 행렬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태원시장 상인들. ⓒ 오마이뉴스 김시연
거리에 서서 동성애자들의 퍼레이드를 신기하게 지켜보던 시민들은 한마디로 "행사는 재미있지만 동성애자들은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태원 쇼핑에 나섰다가 우연히 퍼레이드를 구경하게 된 임성은(인화여고 2년)양과 민선화(인천생활과학고 2년)양은 "주변에 레즈비언 친구들이 있는데 같이 놀지는 않는다"면서 "퍼레이드는 새로운 볼거리지만 동성애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동성애자들을 노려보는 정도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지나가는 동성애자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거나 시비를 거는 중년 남성들도 간간이 있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주인공 '세헤라자드'로 분장한 20대 초반의 레즈비언 딸기(애칭)씨는 한 중년 남성이 "어이, 그거(베일) 내가 벗겨줄까?"라며 시비를 걸자 겁을 먹은 뒤 동료 이반(동성애자간에 서로를 지칭하는 용어...편집자주)들의 베일을 걷는 악의 없는 장난에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20대 레즈비언 비(애칭)씨 역시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동안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폭력적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심지어 신앙 전도에 나선 한 50대 남성은 퍼레이드 개막 행사 도중 계속 트럼펫을 불어대며 노골적으로 행사를 방해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참다못한 한 외국인이 다가가 어눌한 한국말로 "당신 버릇없는 것 같아"고 한마디 던지기도 했다.

▲ 종교 전도에 나선 한 50대 남성이 퍼레이드 개막식 도중 트럼펫을 불어 고의로 행사를 방해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이에 비해 이태원을 찾은 외국인들은 동성애자들의 무지개깃발을 보고 손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는 등의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즉흥적으로 퍼레이드에 참여하거나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외국인도 있었다. 프랑스 국기가 장식된 승용차를 타고 현장을 지나가던 한 외국인의 경적 응원에 퍼레이드 일행이 환호하자 차창 밖으로 왼팔을 쭉 뻗어 답하기도 했다.

"성적 지향 때문에 차별 없는 세상 오기를..."

▲오누이 같은 모습의 폐막식 사회자 홍석천씨와 초대손님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씨 ⓒ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거리 퍼레이드를 마친 수백명의 행렬은 우체국 앞 특설무대 뒤편을 가득 채웠다. 참여연대 노래패 '참좋다'의 노래로 출발한 폐막 축하행사는 삭발머리 때문에 사회자 홍석천씨에게 '동생'이라고 소개받은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의 무대로 후끈 달아올랐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이~반만세 짝짝짝짝짝"
2년 전 '커밍아웃' 했다 공중파방송 출연을 거부당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던 홍석천씨는 "성적지향 때문에 직장이나 가정에서 차별 받지않는 세상이 될 때까지 다같이 손잡고 걸어가자"며 구호를 외쳤다.
무대 뒤편과 통로마다 꽉 들어찬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과 한데 어울려 "게~이 만세, 짝짝짝짝짝", "레~즈 만세, 짝짝짝짝짝", "트랜스 만세, 짝짝짝짝짝" 등 애교 섞인 응원을 이으며 페스티벌을 마치고 저마다 이날 밤새 열린 댄스파티장으로 향했다.

"이반 만세 짝짝짝짝짝"ⓒ 오마이뉴스 김시연


거리 퍼레이드에 만난 '이반들'

▲ 이성애자이면서 이날 거리 퍼레이드에 참가한 이성일씨가 사진촬영에 응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이런 행사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어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동참했는데 동성애자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그동안 제가 레즈비언이란 것을 아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하얀색 배꼽티에 흰 베일을 두른 '아라비안나이트'의 히로인 세헤라자드 복장으로 단장하고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 참가한 20대 초반의 딸기(애칭)씨는 "부모님들이 슬퍼할 것 같아 커밍아웃은 못했지만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말했다. 오히려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겪는 다른 경험이 자랑스럽다고.

"대부분 사람들이 별 의심없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이성애자'라고 단정짓죠. 하지만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동성애자의 삶'을 선택했잖아요. 모두 반대한다 해도 내가 좋으니까 결정한 거죠."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다른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 지난해 행사에는 구경만 했다가 올해부터 퍼레이드에 참가했다는 '비'(애칭)씨는 "대학교 1학년 때까지는 이성애자로 살았다"고 말을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정체성의 혼란이 전혀 없었어요. 대학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비로소 내가 양성애자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충만감을 주는지 직접 경험하면서 '레즈비언을 선택'한 거죠."

갈기갈기 찢은 날개의 천사복장으로 등장한 '모기'(애칭)씨는 이번이 두 번째 참가. "작년보다 참가자도 많고 준비도 보다 꼼꼼했다"고 이번 축제를 평가한 '모기'씨는 "참가 자체로 자부심을 갖지는 않았지만 나날이 발전해나가는 축제를 지켜보면서 내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마초 남성과 심적인 교감을 나누면서 연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모기씨가 꼽은 '동성애자라서 좋은 점'의 하나.

이 날 퍼레이드 참가자 중에는 외국인들도 다수 눈에 띄었다. 주한외국인 레즈비언모임 '사포' 회원들이 퍼레이드에 함께 했기 때문이다. 세계적 동성애자 축제인 '시드니 마디그라 페스티벌'로 유명한 호주 출신 레즈비언 캐리 포터(43)씨는 "가이드북에서는 한국의 레즈비언 이야기를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호주에서는 동네에 대규모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지요. 한국에서는 그런 곳이 없어서 그 동안 내 성 정체성을 개방할 수 없었어요. 한국에서의 내 일을 잃을 것 같았죠. 이런 자치행사를 알게 돼서 정말 기쁘고 놀랍네요."

이날 퍼레이드에 동성애자들만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빨간 드레스를 입고 퍼레이드에 참가한 30대 늦깎이 미술학도, 이성일씨는 이성애자였다. 그는 동성애를 주제로 한 영화학과 학생들의 실험 작품에 참여한 '게이 역할' 배우였다.

"그림을 그리려면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참여했어요. 동성애를 나쁘게 보지는 않아요.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 역시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봐요." /권박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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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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