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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은 뇌성마비 1급 장애인 고명희(29·서울시 신당동·가명)씨는 투표를 마치고 나오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투표하는 것도 참 힘드네요."
고씨는 얼마 전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하철 리프트를 타다가 리프트가 정지해야 할 곳에 멈추지 않아 휠체어와 함께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인해 허리와 등, 배에 강한 충격을 받아 전치 2주 진단을 받고 현재 물리치료 중이지만 유권자로서의 권리 행사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에 13일 투표소를 찾았다.
고씨가 찾은 신당4동 제4투표소는 1층에 마련돼 있어 휠체어를 탄 고씨가 투표하기에 큰 불편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막상 투표소를 찾은 고씨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휠체어가 출입구 턱에 걸려 혼자 힘으로 들어갈 수 없어 다른 사람이 들어 올려줘야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씨는 동네 주민 2명의 도움을 두어 차례 이상 받고서야 투표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투표할 수는 없을까요? 그런 곳에 투표소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참정권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했다는 것이 기분이 찜찜해요. 장애인도 스스로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요."
고씨는 진정한 참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남의 도움 없이도 자유롭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곳에 투표소가 마련돼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거듭 되물었다.
고씨는 경사로가 없어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1층에 투표소가 마련돼 있어서 그 나마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없이 2층이나 3층에 투표소가 마련돼 있는 경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투표를 하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2000년 4.13 총선 때 서영은(35· 지체장애 1급)씨는 투표소가 2층에 있어 도저히 투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것에 서씨는 국가가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해 주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결국 지난 달 31일 최종 승소 판결을 얻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장애인에게는 투표소의 벽은 높기만 하다. 이번 6.13 총선 때도 1만3천여개의 투표소 중 937곳이 1층이 아닌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사로·승강기·휠체어 리프트·도움벨·점자블록·장애인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을 갖춘 곳은 전체 투표소의 31.4%에 불과했다.
또 시·청각 장애인들의 경우는 투표는 물론 선거 관련 정보를 얻기도 힘든 실정이다. 시각 장애인들의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점자 공보물이나 녹음테이프 등의 공약 자료가 필요하지만 현행 선거법 상으로는 강제 규정이 아니기 때문에 지키는 후보도 드물다.
청각 장애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텔레비전이나 선거 유세장에서 후보들의 연설을 통해 정책을 알고 싶어도 수화 통역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어떤 후보가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지 알 수가 없어 아예 참정권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선거전에는 표를 얻기 위해서 장애인들의 편의를 생각하는 것처럼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막상 당선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애인들을 외면하고 마는 정치인들이 많아요. 그런 정치인들을 가려내기 위해서라도 참정권을 반드시 행사해야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그런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산다는 게 참 속상해요."
'장애인복지정책에 관심을 가져줄 후보를 뽑았다'는 고씨는 힘겹게 투표소를 나오면서 "우리나라 장애인들의 현실이 그저 몸서리쳐지게 답답할 뿐"이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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