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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내 기억의 편린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참으로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내가 고민하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척척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듯 보였으니까. 어려운 산수면 산수, 그림이면 그림, 만들기면 만들기, 운동이면 운동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면 안되는 것이 없었고, 또 내가 아버지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천진난만한 시절 그때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하느님, 선생님과 동격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즈음으로 올라가면 그러한 환상은 슬슬 금이 가기 시작하는 법이다. 아버지가 척척 풀어내던 산수라는 것은 사실 덧셈, 뺄셈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고, 그림이나 만들기라는 것도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배드민턴 같은 운동이라는 것도 열 살 안팎의 소년이 도저히 성인을 이길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게 마련인 것이다.
바야흐로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면, 사춘기가 찾아오고 성에 눈뜨게 되면서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이유없는 반항이 극렬하게 시작되는 법이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생이 되고,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다다른 지금, 어느덧 내 눈 앞에 보이는 아버지는 너무나 왜소하고 힘없어 보이는 사내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나이들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느덧 연민의 정을 느끼는 존재가 나 하나뿐인 것은 아니리라.
성석제의 소설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는 이러한 나이든 아버지의 자화상을 그려낸 이야기이다. 소설 속의 아버지는 참으로 철없는 존재이다. 외부로는 한없이 약하고 힘없는 존재지만 아들 앞에서만큼은 전능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어린 시절 우리가 겪어온 바로 그런 아버지이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로서의 폼잡기'에 자식들이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터인데도, 끝까지 그만의 폼잡기를 고집한다. 이미 과거의 숭고한 아버지의 신화는 깨지고, 이제는 보호자로서의 그가 아닌,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됐음직한데도, 그는 아직도 자신만 믿으라고 큰소리친다. 그의 아내한테도 매여 사는 아버지는 적어도 자식한테만은 영원한 아버지로 남고 싶은가 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단지 쇠락한 구세대의 모습이 아닌, 이 시대의 아버지 그리고 장차 내가 겪어야 할 부정의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장면 장면에는 묘한 위트와 유머 그리고 단순히 웃어넘길 수 만은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내가 취미삼아 휘발유를 낭비하고 다니는 부호의 대표라도 되는 듯이 흘겨보며 말한다.
"이번 달에는 수출 목표가 달성되겠냐, 바이어들은 계속 오고? 시원찮지? 바빠야 할 네가 도시락 싸들고 이런 데까지 사람을 쫓아다니니까 그런 거다. 가봐"
아빠와 새 친구들은 번쩍거리는 차와 아빠와 나와 하늘과 자신들의 공사판을 번갈아보면서 몹시 헛갈린다는 표정들이다.
성석제의 단편 소설은 묘한 특징을 가진다. 그것은 그의 소설들이 철학적인 장치를 마련한다거나 현실을 해체하는 일 없이, 마치 구술가의 입을 통해 전달되듯,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독자는 단지 재담꾼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청객의 입장이 되어 그냥 이야기를 들으면 될 뿐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다채로운 색채를 띤다. 구조의 분석과 현상의 해체가 될 때 사라질 수 있는 일상의 묘한 광채를 그의 글 속에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함과 부조리의 틀로 현상을 분리해낼 때 사라질 수 없는 일상의 다양한 굴곡들을 그의 글들은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가치판단은 다만 우리가 따로 할 일인 것이다.
담론은 현실을 판단함에 있어 중요한 기재지만, 또한 담론에 사로잡혀 현실을 바라볼 때 담론 이상의 것을 집어내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담론에 얽매이지 않고 쓰여진 작품은 독특한 색채를 띠는 것이다. 소설 속의 아버지의 부정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나중에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다만 그의 문장 속에서 살아나는 이 시대의 힘없는 아버지의 '힘겨운 폼잡기'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상의 굴곡들을 감상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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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성석제 지음, 민음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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