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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에 삽입된 계동수의 작품 중에서.
ⓒ 계동수
홍익대 앞과 인사동에서 소설가 전경린(40)을 우연찮게 두어 번 만난 적이 있다. 영남 사투리가 적당히 섞인 조용한 말투하며 수줍어하는 눈빛. 퍽이나 수수하고 또 순수해 보였다.

그런 전경린의 겉모습은 <열정의 습관>에서 독자들을 놀라게 했던 거침없는 성애묘사와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녀 소설의 키워드라 할 관능과 정염 역시 보여지지 않았다.

작가들이야 원래부터 두어 가지의 아이덴티티를 동시에 보여주는 존재. 기자가 느낀 작품과 그녀 인상의 부조화는 전경린의 내면풍경이 그만큼이나 다층적이고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여러 개의 도록(圖錄)이나 화첩(畵帖)을 동시에 넘겨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특유의 문체와 권태의 일상을 사는 여성들의 메마른 내면풍경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전경린. 그녀의 작품이 사진을 만났다. <첫사랑>(봄). '이미지와 소설의 행복한 만남'을 지향한다는 누벨디마쥬 시리즈 3편이다.

책에는 최근작 <첫사랑>과 29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염소를 모는 여자> 등 두 편의 작품이 실렸다. 사진작가 계동수는 '첫사랑'처럼 애틋하고, '30대 후반 여성의 내면'처럼 복잡한 전경린 소설의 이미지를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놀랍고 매혹적인 것이라고는 없는 지방 소도시. 만화영화 주인공같은 이름을 가진 열아홉 소년 하록의 방황과 죽음을 회색톤의 수채화처럼 그려낸 '첫사랑'은 그 묘사와 서술의 담담함으로 가슴을 적신다.

여기에 계동수가 포착한 해바라기와 외딴집, 인적이 없는 쓸쓸한 섬과 안개꽃은 독자들을 '그래, 내게도 표현 못한 첫사랑이 있었지'라는 우울한 감상으로 이끌고 있다. 말 그대로 글(소설)과 그림(사진)의 절묘한 조화다.

▲ <첫사랑>
ⓒ 봄
'염소를 모는 여자'의 촬영에는 에피소드도 있다. 갑자기 구제역 파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요한 모델(?)의 역할을 해내야 할 염소를 구할 수가 없었던 것. 겨우겨우 구제역이 돌기 전에 팔려온 염소를 성남 모란시장 구했고, 작업은 그 귀한 모델을 섭외하고 나서야 진행될 수 있었다.

서늘함과 뜨거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전경린의 소설과 계동수에게 포획된 비오는 강화도의 풍광들. 이 둘의 결합이 만들어낸 시너지 효과를 맛보는 것은 범상치 않은 즐거움이다.

섬으로 가는 뱃길에서 만난 빗줄기, 새벽녘 푸른 안개, 너무나 적요해서 슬퍼 보이는 흐린 날의 거리. 계동수가 포착한 사진 속 풍경과 전경린의 소설은 지독히도 닮았다. 그것들에 가슴이 흔들리는 기자의 성정도 그들과 닮은 걸까?

열정의 습관

전경린 지음, 자음과모음(이룸)(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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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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