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달리던 기차는 새벽녘이 되면서 다소 숨을 고르는 듯 호흡이 차츰 느려진다. 그 느려진 숨소리에 뒤척이다 눈을 떴다. 그러나 기차는 여전히 가쁘게 달리고 있다. 숨을 고르는 것은 기차가 아니라 창 밖으로 펼쳐져 있는 사막의 설원 풍경이다. 아직도 얼어 있는 사막의 황무지 위로 하얀 설원이 숨을 죽이며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한기가 몰려온다. 설원의 풍경이 몸의 체온을 자극한 듯싶다. 시간은 6시가 조금 넘어 있다. 세 시간쯤 뒤에 기차는 둔황역에 안착할 것이다. 36시간만에 땅에 발을 내디딜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제 슬슬 잠시 동안의 임시거주지였던 기차가 그만 지루해지는 순간이다.
나의 일행들은 아직도 곤한 잠에 빠져 있다. 아랫칸 할아버지도 아직 단잠중이시다. 무슨 좋은 꿈을 꾸시는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어린 소년처럼, 꿈속의 어딘가에서 재미난 장난이라도 하는 듯한 웃음이다. 승무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창문의 커튼을 걷는다. 실내 방송에서는 아침 음악이 흐르고, 부스럭부스럭 사람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다.
사막의 설원들이 이어지는 걸 보면 이제 실크로드의 '쉼터' 둔황이 지척에 있다는 증거이다. 장안(지금의 시안)에서부터 이탈리아 로마를 연결했던 이 길은 흔히들 '비단길'이라고 불리는 다소 낭만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길은 비단을 싣고 나르는 상인들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구도의 길을 찾아 떠난 수많은 구도승들의 고행의 길이기도 했고, 둔황 너머의 서역(西域. 중앙아시아)땅을 둘러싸고 피튀기는 혈전들이 오고갔던 변방 병사들의 '죽음의 길'이기도 했다.
이 길은 또한 비단과 종교, 병사들을 실어나르면서 한편으로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연결했고 다양한 종교적 사상들을 융합했던 이해와 관용의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그들 사이의 차이를 이어주었던 '대화의 길'이었다.
여러 개의 험난한 산맥과 설산들, 죽음의 사막들을 지나온 이들에게 둔황은 살아남았다는 생존을 증명하는 땅이기도 했다. 마치 오랫동안 사막에서 물 한방울 구경하지 못하다가, 눈 앞에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이제는 살았구나"하는 안도감과 생명력을 주는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얼마간 원기를 되찾은 사람들은 다시 동으로 서로 흩어지면서 비단과 종교, 대화의 내용들을 전파하고 다녔다. 그래서 둔황은 이들의 집산지이자, 비단길을 넘어온 수많은 문화들의 교류장소, 고대의 '문화살롱'이었던 셈이다.
아침 9시 20분경. 드디어 기차가 둔황역에 안착을 한다. 바리바리 짐들을 둘러메고 내릴 준비를 하는 사이, 아랫칸 할아버지와 일층의 엘리트 아줌마가 못내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종이쪽지 위에 우루무치 집주소들을 적어준다. 혹시 길 위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나중에 우루무치에 와서 잘 곳이 없으면 연락을 하란다. 누추한 집이지만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할아버지는 그래도 안되었던지 당신이 찍은 사진 중의 한 장을 꺼내 기념이라며 일행 중 젊은 사진가 친구에게 건네준다. 앞으로 좋은 사진 많이 찍으라는 당부와 함께. 그리고 내리는 우리들을 배웅하러 기차 밖으로까지 나와서 오랫동안 손을 흔드신다. 그 모습이 못내 아쉽고도 정겹다. 실크로드 위에서의 첫 만남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미소처럼 오랫동안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기억되리라.
퇴락한 고도(古都)의 잔영
둔황역(이곳에서는 흔히들 옛 이름 그대로 류위안역이라고도 불린다)에서 둔황 시내까지는 차로 달려도 두 시간은 족히 달려야 하는 거리다. 미모의 젊은 아줌마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굴곡이라고는 전혀 없는 평평한 사막의 아스팔트를 한없이 달렸다. 깜빡 졸다가 언뜻 다시 눈을 뜨면 여전히 지루한 아스팔트와 황량한 사막만이 이어지고 있다. 군데군데 양떼를 몰고가는 목부들의 모습이 그나마 볼 수 있는 풍경이라면 풍경이다.
우리들은 지금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곳 둔황에서 그 사람은 우리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다. 아무 준비없이, 무작정 둔황만을 바라보고 올 수 있었던 배짱도 실은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같이 온 선배의 지인이기도 한 그 사람은 이곳 둔황에서만 오년을 넘게 살아온 유일한 한국인이자, 화가이기도 하다. 더불어 둔황 막고굴 연구소의 유일한 한국인 연구원이다. 둔황에서 머문 기간동안, 그는 우리에게 든든한 '빽'이었다.
택시가 시내로 접어들면서 조금 번화해 보이는 시가지가 보이고 듬성듬성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리지어 시야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고도(古都) 둔황 시내의 모습은 '크게 흥성할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그 이름만큼 그렇게 흥성해보이지는 않는다. 예전 한때 번영을 누렸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마치 늙고 쭈글쭈글해진 촌로(村老)의 얼굴같은 모습이다.
한무제(漢武帝)가 이곳을 서역경영의 전진기지로 삼으면서 본격적인 실크로드 시대가 열린 것처럼, 둔황의 운명도 줄곧 실크로드의 흥망성쇄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둔황의 지리적 위치 자체가 중국의 중앙과 서역을 이어주는 복도구실을 하는 허시저우랑(河西走廊, 황하서쪽에 있는 긴 복도라는 뜻)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곳은 한족 외에도 흉노나 티벳트 등의 다른 많은 민족들간에 쟁탈이 빈번했던 곳이다.
실크로드가 서서히 바닷길로 대체되는 10세기말 전까지 둔황에는 수많은 지배자들이 교체되었지만 그 기간 동안 둔황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실크로드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빛나는 황금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원을 둘러싼 세력다툼이 치열해지면서 둔황을 비롯한 서역 실크로드도 차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때마침 세계 교역의 중심도 육로의 실크로드에서 바닷길을 통한 새로운 '향료길'이 열리는 시기였다.
그리고 다시, 20세기 벽두의 어느날 아침. 무지한 한 사람의 우연한 '대발견'은 이 잊혀진 '사막의 땅'을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불러들였다. 그 이야기는 막고굴편에서 차근차근 하기로 하자.
지금의 둔황에는 과거의 찬란했던 실크로드의 영광들은 없다. 낡고 퇴락한 촌도시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생각해보니, 이곳 둔황은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고도이기도 하지만 또한 지금은 중국 내에서 대표적으로 가난한 동네, 서부지역 깐수성의 작은 도시라는 게 떠오른다.
이곳에 세계적인 불교문화 유산 막고굴이 없었다고 하면, 이 작은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둔황은 예전에 진작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을 것이다. 막고굴의 찬란한 그림자를 걷으면, 지금의 둔황은 영락없이 가난한 '사막의 땅'일 뿐이다.
옛 실크로드 고도들의 퇴락한 모습은 비단 둔황만이 아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투르판과 카스, 우루무치에서도 그 사라진 비단길의 꿈은 곳곳에 퇴락한 잔영만을 드리우고 있다. 더 이상 비단을 실어나르는 상인들도 없고, 구도의 길을 떠나는 승려나, 전쟁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모습도 없다. 이 길을 통해 이제는 동서의 문화나 대화가 교류되지도 않는다.
실크로드가 쇠퇴하고 대화의 길이 차단되었던 것처럼 그 길 위에 있었던 옛 도시들도 자신들의 '꿈'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둔황 시내 중심에 서 있는 '비파를 켜는 선녀상'을 보면서 문득, 이 도시의 잃어버린 꿈이 무엇일까 하는 짧은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명사산(鳴沙山) 오르는 길
사막을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얼마나 많이 사막을 동경해 왔는지 모른다. 미지의 것에 대한 모든 동경이 다 상상에 불과한 관념이듯이, 사막을 직접 오르기 전까지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 또 다른 세계였다. 사막을 다녀온 사람들의 기행문은 하나같이 또 얼마나 낭만의 극치를 이루는지. 사막위의 불타는 석양이니 낙타의 등위로 부는 우아한 모래바람이니 등등.
그러나 우리가 간 둔황의 명사산에는 불타는 석양도 우아한 모래바람도 없었다. 우리를 안내하고 앞장선 이곳 둔황의 한국인 화가 서용씨도 처음에는 명사산의 석양을 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장담을 했다. 그 불타는 사막위의 석양을 보기 위해서는 천천히 아주 느린걸음으로 사막의 능선을 하나씩하나씩 밟아보아야 한다며. '文化苦旅'(중국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중국의 유명한 기행작가 위치우위(余秋雨)도 이곳 명사산을 오르면서 이런 당부를 했다.
"사막중에는 길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곳에는 없다. 멀리서 보면, 비뚤비뚤 나 있는 발자국들이 있다. 그 발자국들을 따라 걸으면 되지만 그것은 별로 좋지가 않다. 다른 사람이 밟은 곳은 오히려 걷기가 힘들다. 자기의 발자국을 만들면서 새로운 길을 걸어보라. 뒤돌아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보면 분명히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스스로의 발자국을 만들면서 천천히 아주 느린 걸음으로 사막의 능선을 하나씩 하나씩 밟아갔다. 그 능선의 끝에서 마주치게 될 황홀한 석양과 뒤돌아 서서 자기의 발자국들을 볼 때의 그 희열을 기대하면서.
둔황 시내에서 약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명사산은 이름 그대로 모래가 우는 산이다. 이곳은 사막이 쌓여 산이 된 거대한 모래산으로, 모래가 흘러내릴 때 공명이 되어 소리가 난다고 하여 명사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서용씨는 그 소리가 마치 흐느끼는 소리 같다며 '모래의 울음소리'라고도 하였다.
그날 우리가 올라간 명사산의 '모래 울음소리'는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흐느낌이 아니라 통곡하는 듯한 울음 소리였다. 바람이 너무 거셌던 것이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는 모두 '모래울음'이 가득찼다. 손에 든 카메라의 렌즈속으로도 사정없이 그 울음이 스며든다.
바람부는 모래 사막 위를 걷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보다 몇배는 더 힘들다. 모래바람은 참으로 잔인했다. 낙타의 등 위로 부는 우아한 모래바람 따위는 죽은 문장 속에나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사막을 동경하며 그곳에 상상이외의 낭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유치한 감상도 통곡하는 모래울음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마르코 폴로도 넘었을 것이고 삼장법사 현장과 '왕오천축국전'의 혜초도 넘었을 이 사막을 걸으면서 나는 또 한 명의 엉뚱한 인물을 떠올린다. 중국의 수많은 소녀들에게 '사막의 꿈'을 심어줬던 요절한 작가 싼마오(三毛)의 얼굴이다. 그녀의 이름은 곧 사막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에게 싼마오(三毛)는 70-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덩리쥔(鄧麗君)만큼이나 애절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쟝아이링, 딩링 등과 함께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싼마오는 그녀의 작품못지 않게 인생 자체의 전기적(傳記的)인 요소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묘한 동경심을 심어주었다. 더군다나 삶 못지 않게 죽음 역시 현재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어 사람들은 그녀가 떠난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삶이 아직까지 중국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이유 중에는 사막에서 보낸 동화같은 삶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싼마오는 생전에 스페인을 여행할 당시 한 이국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그와 운명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사하라 사막'에서였다.
평소 사막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던 싼마오가 사하라사막행을 결심했을 당시 그 이국의 남자는 그녀를 위해 함께 동행하기를 자처했다. 1973년, 그들은 사하라 사막의 작은 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싼마오와 그 이국의 남편은 사하라사막에서 거의 일천일을 사하라주민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살았으며, 그후 그녀는 당시 생활을 담은 '사하라 이야기'를 책으로 발표하였다. 이책은 아직까지도 중국에서 널리 애독되는 명저 중의 하나이다.
사막의 능선을 넘으면서, 명사산과는 무관한 그녀가 떠오른 까닭은 한때 그녀의 동화같은 이야기에 혹했던 적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사막에서 일천일을 살았다는 그녀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오지의 사막땅에서 오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다는 서용 화가 역시 존경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우연히 둔황을 여행하면서 본 막고굴을 접하면서 말할 수 없는 가슴떨림을 느꼈다고 한다. 그 후, 마음속에 하나의 '꿈'을 품고 이곳 오지의 땅 둔황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사나운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의 능선을 오르면서 나는 그들이 꿈꾸었던, 혹은 지금도 꿈꾸고 있는 그 치열한 열정과 꿈들이 부러웠다. 실크로드 곳곳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단길의 꿈'처럼 나도 그런 치열한 '꿈' 하나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석양을 뒤로 하고
몇 개의 사막 능선을 넘었을까. 과연 서용씨는 베테랑다운 솜씨로 저만치 홀로 앞서가 있다. 나와 선배는 맨 뒤에서 패잔병들처럼 어기적거리며 걷는다. 앞서간 두 사람은 마지막 능선인 듯싶은 곳에 철퍼덕 주저앉아 캔맥주 하나씩을 마신다. 드디어 정상(?)인가 보다.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가쁘게 달려, 우리도 그들 곁에서 캔맥주 하나씩을 들고 건배를 한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래를 뒤집어쓰고 앉은 우리는 말없이 홀짝홀짝 각자의 맥주만 마시고 있다. 맥주는 이미 절반이 모래다. 맥주를 마신다기보다는 모래를 마시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앉아서 우리는 사막의 석양을 기다리고 있다. 능선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다시는 사막에 오지 않으리"라고 합창했던 우리들은 다시 한번 사막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를 품고 있다. 석양을 볼 수만 있다면.
가지고 온 맥주를 다 마셨는데도, 해는 떨어질 생각을 안한다. 바람은 갈수록 더 거세진다. 입만 열면 그 안으로 사정없이 들어오는 모래들 때문에 우리는 모자를 눌러쓰고 입을 굳게 다문 채 가만히 웅크려 앉아 석양이 나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시간은 이미 7시를 향해 가는데도 해는 아직도 멀쩡히 중천에 걸려 있다. 시간이 깊어질수록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고 기온도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견딜 수 없는 한기가 느껴지면서, 이제는 석양이고 나발이고 제발 모래바람이 없는 따뜻한 지상으로 내려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말은 안하지만 다들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드디어 우리를 이 고행의 공간으로 이끌고 온 서용씨가 먼저 입을 연다.
"내려 갑시다. 바람이 너무 세서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다들 병나겠어요. 석양이야 언제든지 볼수 있는 거…."
다들 못 이기는 척 아쉬운 표정으로 모래를 털며 일어났다. 그래도 선배는 끝까지 석양을 보고 가겠노라고 고집을 피운다. 그러나 선배의 그 마지막 집념도 몰아치는 모래바람과 몸이 덜덜 떨려오는 차가운 기온 앞에서 얼마 안가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터덜터덜, 다시 새로운 발자국을 만들며 사막의 능선을 내려가는 우리들의 등 뒤로 여전히 명사산의 모래들은 거칠게 울고 있다. 저 사막 위를 걸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온 발자국들을 뒤돌아보며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그날밤, 우리는 둔황 시내의 야시장 골목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명사산의 석양을 보지 못한 허전함과 둔황에서 보내는 첫 밤에 대한 묘한 흥분이 뒤섞여, 야시장 골목의 낡은 전등불이 하나둘 꺼질 때까지 긴긴 건배를 했다. 취하는 사람도 없고 취기도 오르지 않는 이상한 밤이었다. 아마도 다들 각자의 '꿈'에 취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퇴락한 실크로드의 잔영이 깊게 드리워진 둔황에서의 첫 밤은, 잃어버린 이 소도시의 꿈과 우리들의 살아있는 꿈들이 하나로 엉키면서 명사산의 모래바람같은 긴 울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