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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사관저로 들어가는 덕수궁 돌담길 이길은 1897년까지만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미대사관저로 들어가는 덕수궁 돌담길이길은 1897년까지만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 신용철
1897년까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 길이 전경들의 삼엄한 경비로 일반인들의 자연스러운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현 덕수궁 건너편에 위한 미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 등 때문이다.

현재 미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 등이 위치한 정동 땅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조선주재 초대 미국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한 푸트(H. Foote)공사가 1883년 5월 20일 민계호와 민영교 소유의 사저를 구입해 미국공사관으로 사용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물론,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 넘어가자 일방적으로 국교를 단절하고 본국으로 복귀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경운궁 석조전에 본부를 삼고 경운궁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옛 미국공사관은 미국에 다시 넘어가게 된다.

옛 미국 공사관 전통 한옥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지금의 미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 자리이다.
옛 미국 공사관전통 한옥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지금의 미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 자리이다. ⓒ 홍순민
다시 말하지만, 미국의 덕수궁터 구입과 관련하여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정동지역 땅매입은 1883년 5월인데, 조선에서 외국인의 땅매입이 가능했던 것은 1884년 10월부터였다. 이로 미뤄 미국이 조선의 땅(정동)을 불법 취득했다는 것을 알 수는 것이다.

처음 푸트공사의 사재로 구입한 미국공사관 토지는 다시 미국정부가 공식적으로 구입하게 된다. 푸트공사가 민영교와 민계호의 사저를 구입한 지 4년 후 소유권이 미국정부로 넘어가자 한성부에서는 공식적인 문서를 발급하는데 그 문서에는 현재의 미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등의 토지를 '영원히 팔린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경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가다보면 커다란 철제 대문이 나오고 대문 옆에는 미국대사관저임을 증명하는 표식과 함께 '하비브하우스'라는 현판이 부착되어 있다.

1994년 6월 지미 카더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김일석 주석을 만나고 돌아와 기자회견을 했던 장소인 '하비브 하우스'는 어떤 곳일까?

현재 미국대사관저가 위치한 곳은 주조선 초대 미국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한 푸트(H. Foote)공사 1883년 5월 매입한 것으로 푸트 공사는 1600년대 지어진 전통 한옥에서 1883년부터 1905년까지(확인요망) 생활을 했다. 현재 그 전통가옥은 미대사관저를 방문하는 손님이 묵는 영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비브하우스'는 미대사관저를 방문하는 손님이 묵는 영빈관을 말하는 것이다.

하비브 하우스 현판 미대사관저로 인해 삼엄한 경계를 세우고 있으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있다.
하비브 하우스 현판미대사관저로 인해 삼엄한 경계를 세우고 있으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있다. ⓒ 신용철
'하비브 하우스'는 1971년 10월부터 1974년 8월까지 한국 주재 미국대사로 있었던 필립 하비브(Philip Habib)의 이름을 딴 것으로 하비드 대사가 전통한옥을 사용하던 중 1972년에 2백년이 넘은 한옥 관저가 '기둥이 엇갈려 내려앉는 소리'가 나서 서둘러 철거하게 된다.

하비브대사는 새 관저가 옛 건물과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건축양식과 역사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위싱턴의 입안자들은 서양식 관저를 짓자고 제안했다.

하비브 대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새로 지어질 관저는 외관을 한옥 기와집 형태로 만들도록 결정되었으며, 새로운 관저는 일명 '도깨비 박사'로 유명한 조자용(종로의 YMCA 건물도 설계)의 설계로 1974년 말에 공사를 시작해 1976년 4월 완공되었다.

하비브 대사는 새로운 관저의 공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본국으로 귀국했지만, 한국문화에 대한 그의 이해와 보존 노력에 대한 뜻을 새겨 새로운 공관을 '하비브하우스'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하비브 대사는 외국인들이 전통 한옥관저를 드나들면서 그네들의 높은 '실크 해트'가 대들보에 닿아 망가지니 새로운 관저는 서양식으로 지으라는 요구에 대해 "조선사람들은 실내에서 모자를 쓰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라고 말해 한국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이해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현재 근대문화유산으로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하브비 하우스'는 'ㅁ'자 구조의 한옥 형태를 띠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네모난 중정과 마당에는 연못이 자리잡고 있어 고풍스러운 한옥의 멋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비브하우스'를 눈여겨 볼 것은 필립 하비브 미국 대사의 한국 문화와 전통에 대한 남다른 이해만이 아니다.

태조 이성계가 1397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비가 죽자 사대문 안에는 묘를 쓸 수 없다는 원칙과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동 인근에 묘를 두도록 했던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이 하비브하우스 권력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후의 영혼을 위해 흥천사라는 절을 세웠으며, 신덕왕후의 능을 '정능'이라 칭해 경운궁 일대가 '정숙한 동네' 즉, 정동이란 이름을 얻게 된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정숙한 동네' 정동에 대한제국의 국법을 어기로 불법으로 토지를 매매하여 외국공관으로는 처음으로 정동에 공사관을 낸 미국이 '정숙한 동네' 정동의 시원에 자리잡고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와 당대 왕의 4대조 어진(御眞:임금의 초상화)을 모셔놓고 수시로 왕이 다례(茶禮)를 올리던 선원전 터에 미국 대사관, 아파트 등 대형 복합외교공관을 짓는다고 하니 '정숙한 동네'에 침입한 도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세군 사관학교

1908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구세군의 사관 양성 및 선교와 사회사업 본부로 사용되던 건물로 1928년 완공되었다.

구세군 사관학교
구세군 사관학교 ⓒ 신용철
덕수궁 석조전과 비슷한 건축양식을 갖고 있는 구세군 사관학교는 사적지로 지정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고종이 경운궁을 신궁으로 정해 옮긴 후 황궁 500m 내에서는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그러던 것을 한성부 (지금의 외교통상부)와 논의해 앞으로 정동지역 땅을 팔 사람은 한성부의 허가를 맡도록 했다.

현재 서울시 조례에는 4대문 안에서 국가지정문화재는 100m, 시지정문화재는 50m 이내의 건물고도제한을 두고 있다.

그러나 구세군사관학교는 고종칙령이 내려진 세워진 건물로 덕수궁과 100m 정도도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선원전 터에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과 관련하여 구세군사관학교가 '형평성'문제에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원전

경기여고 부지와 현 하비브 하우스 북쪽을 포함한 지역에 위치했던 선원전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와 당대 왕의 4대조 어진(御眞:임금의 초상화)을 모셔놓고 수시로 왕이 다례(茶禮)를 올리던 곳이다.

선원전 터 신축 미대사관, 아파트 건축 예정지
선원전 터신축 미대사관, 아파트 건축 예정지 ⓒ 겨레문화답사연합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시대에도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자리잡고 가장 존귀하게 받들어지며, 일상적으로 기념되던 공간이었던 것이다.

선원전은 명성황후, 순종비, 헌종비, 엄비의 '혼전'이 있었던 곳으로 일제시대에는 경성제일고등학교가 들어섰으며, 해방 후에는 경기여고가 자리잡았다.

현재 경기여고가 강남으로 이사간 뒤 선원전 터는 (경기여고 부지)는 전경의 훈련장소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을 놓고 시민단체와 미대사관측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비역이 바로 경기여고 부지인 선원전 터이다.

선원전 앞 아이들 선원전에 미대사관, 아파트가 신축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신나기만 하다.
선원전 앞 아이들선원전에 미대사관, 아파트가 신축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신나기만 하다. ⓒ 신용철
현재 미대사관측에서 선원전 터에 신축하려 하는 미대사관, 아파트, 군인숙소 등은 총 3개 건물(각각 지하 2층에 지상 15층, 지상 8층, 지상 4층)을 지어 복합단지를 만든다는 구상이다. 미대사관이 지으려는 복합단지는 조선총독부의 약 1.8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계획은 1984년 서울시와 미대사관측은 현재 세종로 미대사관과 한국은행 앞 대사관저와 선원전 일대를 교환하는 매매계약 체결에 근거하고 있다.

서울시청 관계자에 따르면 "미대사관측과 매매계약을 맺은 자리가 조선 태조와 왕의 4대조 어진을 모시는 선원전인 것을 몰랐다고 해 빈약한 정부의 역사관을 반증해준다.

경기여고 부지의 담을 보면 평지보다 매우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선원전 발굴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원전 자리에 흙을 붇돋아 경기여고 건물을 지었기 때문으로 역사유물을 발굴하다 초석이 나오면 그 자리에 다시 복원하는 것이 상식인 것을 감안한다면 선원전 터에도 소중한 문화유산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보는 것도 무방하다.

한국청년연합회 덕수궁 우리궁궐길라잡이인 김기주씨는 "미국은 여중생 사망사건과 지난 7월 8일 방송에 출연하여 미 대사관, 아파트 건립을 강행하겠다고 했다"며 "미국은 문화적 가치나 한국 국민의 여론을 무시한 채 안면몰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기주 길라잡이는 또 "미대사관을 지으려는 면적에는 주차장대수가 520대 가량 되는데 신고한 것은 126대였다"며 "정동의 용적률이 300%인데 미국 대사관, 아파트 신축부지는 용적률이 106.7% 밖에 되지 않아 특별적용 요구를 하고 있다"는 등의 미대사관측의 오만함을 비판했다.

구 러시아 공사관

현재 첨탑은 러시아공사관의 일부로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일부 남았던 첨탑을 복원한 것이다.

구 러시아 공사관 높은 지대에 굉장히 크고 요사스러운 건물이 한껏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구 러시아 공사관높은 지대에 굉장히 크고 요사스러운 건물이 한껏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 홍순민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고종과 순종이 탈출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명 '아관파천(1896년)'으로 불리는 사건을 계기로 고종과 순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약 1년가량 머문 후 경운궁을 수리해 환궁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와 경운궁을 연결하는 비밀통로가 현재 미대사관저에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러시아 공사관은 고종이 자신의 궁궐을 버리고 남의 나라 공사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한국 근대사의 아픔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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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 2002년 3월~12월 인터넷시민의신문 편집위원 겸 객원기자 2003년 1월~9월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 창립멤버 및 취재기자 2003년 9월~2006년 8월 시민의신문 취재기자 2005년초록정치연대 초대 운영위원회 (간사) 역임. 2004년~ 현재 문화유산연대 비상근 정책팀장 2006년 용산기지 생태공원화 시민연대 정책위원 2006년 반환 미군기지 환경정화 재협상 촉구를 위한 긴급행동 2004년~현재 열린우리당 정청래의원(문화관광위)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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