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침에 차내 방송과 승무원의 지도에 따라 체조를 하는 중국 기차 승객들.
아침에 차내 방송과 승무원의 지도에 따라 체조를 하는 중국 기차 승객들. ⓒ 박현숙
막고굴 관람 이후 계속 심한 몸살감기를 앓고 있던 선배는 둔황을 떠날 때까지도 회복을 못하고 있었다. 선배 말마따나, '팔자에 없던' 여행을 하다보니 몸이 놀란 것 같다. 아픈 몸에 무거운 배낭까지 짊어진 선배를 그 지옥같은 열차에 태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나도 잠시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래도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기차에 올라탄 뒤 비어 있는 침대칸의 표를 사면 된다. 종착역인 우루무치까지는 앞으로 약 12시간 정도밖에 안남았기 때문에 중간에 침대칸에서 내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희망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기차 안의 풍경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설 자리도 없이 빽빽하게 달라붙은 사람들이 급기야는 창 밖으로까지 얼굴을 내밀고 거친 숨들을 몰아쉬고 있다. 냄새나는 화장실이 있는 좁은 복도에도 사람들이 촘촘하게 들어차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달려왔는지,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며 설 자리를 확보하려는 '신입'들의 거친 몸부림에도 그저 퀭한 눈으로 힐끔 한번 쳐다볼 뿐이다. 초탈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몸이 잠시 앞으로 쏠리면서 내 몸도 누군가의 몸 위로 엎어졌다. 일어나보니 형편없이 마른 몸에 땀과 먼지 등으로 얼굴이 새까매진 한 부부가 나를 예의 그 퀭한 눈으로 올려다 보고 있다.

아내의 몸을 감싸고 있는 남자의 표정과 눈은 순간, 울컥하고 치밀어 오를 듯한 알 수 없는 슬픔을 준다. 그들 등 뒤로는 둘을 합쳐놓은 몸집의 몇 배는 될 듯한 커다란 짐자루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퀭한 눈빛, 시루떡 같은 중국 완행열차의 기억

2년 전 이맘 때,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오는 완행열차를 탄 적이 있었다. 그 기차도 아주 끔찍하게 낡고 형편없는, 사람을 마치 시루떡처럼 쌓아놓고 달리는 기차였다.

그때도 좌석표를 구하지 못했다. 밤새 한잠도 못자고 달려왔던 지라 또 그렇게 밤새 서서갈 엄두가 안났다. 하여, 소위 암표라는 것을 샀다. 정상 가격의 두 배를 주고 침대칸 암표를 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 표는 가짜였다. 기차에 올라탄 뒤, 지정된 침대칸표를 승무원이 주는 침대칸 보관표와 교환하려고 할 때 표가 가짜라는 게 밝혀진 것이다.

그곳에서 쫓겨난 나는 다시 얼마의 돈을 주고 삼등칸 입석표를 사서 밤새 또 그렇게 서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설 자리도 없어서 바닥이 온통 침에다 담뱃재 투성이인 화장실 옆 복도에 겨우 기대설 수 있었다.

몸도 힘든 데다 사기까지 당하고 평생 다시는 타고 싶지 않은 지옥 같은 기차에서 16시간이 넘게 서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절망감이 몰려왔다. 실내가 더웠던지라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한동안 멍하니 그렇게 서있자니 목울대를 타고 울컥하니 울음이 넘어오려고 한다.

조금 울었는지 어쨌는지, 내 표정이 아마도 너무나 안되어 보였나 보다.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쳐다보니, 형편없이 마른 몸에 연탄재를 뒤집어쓴 것처럼 시꺼먼 얼굴을 한 남자 한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도 퀭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옆에 신문지 한 장을 깔더니 와서 앉으라는 손짓을 한다. 그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는 마른 두 다리를 잔뜩 오므리고 있다. 하여, 나는 염치없게도 잽싸게 그가 만들어준 그 좁은 공간에 철퍼덕 앉고 말았다.

그때는 앞뒤 가릴 정신도 없었거니와 얌체 같은 누군가에게 그 자리마저 뺏길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바닥에 앉자마자 정신없이 졸았던 것 같다. 그때는 그 자리도 천국이었다.

졸다가 깨다가 하기를 몇 번인가 반복하다 옆을 돌아보니, 나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었던 그 퀭한 눈빛의 마른 남자는 어느새 내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종착역이 가까워올수록 내리는 사람들도 많아 기차 안은 실내에도 넉넉하게 서서 갈 수 있는 자리들이 많아졌다.

복도 구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 남자도 자기 몸집보다 더 큰 짐자루들을 등 뒤에 쌓아놓고 있었는데, 그가 내릴 때 왜 조금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지 참으로 의아했다. 조는데 온 정신이 팔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나는 건, 그 남자의 마른 몸집과 쾡한 눈빛밖에 없다.

시루떡 같은 중국 완행열차에 대한 또 한 편의 기억. 역시 좌석표를 구하지 못해 입석으로 가야 했던 타이산(泰山)행 기차이다.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탔던 짐짝 같은 입석 완행열차였다. 승차하자마자 키 큰 남자들 틈에 끼여 고개도 들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져 버렸다.

조금 과장해서, 몇 분 뒤 숨이 막혀 죽는 게 아닌가 하는 겁까지 났던 순간이었다. 다행히 뒤에서 밀어붙이는 사람들 때문에 앞으로 앞으로 밀려와서 실내로까지 진입할 수 있었지만 역시 서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실내는 여기저기서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사람들의 절은 땀냄새에 온갖 음식 냄새가 뒤죽박죽이 되어 아주 황홀한(?) 향기를 피워내고 있다. 그 당시 삼등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몰골만 봐도 대부분이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 위 선반에는 덩치보다 큰 짐자루들이 몇 개씩 쌓여 있고, 탁자 위로는 수북이 쌓인 해바라기씨며 땅콩껍질들, 싸구려 맥주병들, 카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지옥같은 그 기차 안에서도 사람들은 용케도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으며 머나먼 길을 달리고 있었다.

중국인들의 성격을 논할 때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인내심이라는 것인데, 그것의 구체적인 함의가 저절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아무리 짧은 여행이라도 대부분은 열 시간이 넘게 기차를 타야하는 이들에게, 더군다나 짐짝같은 기차에서 입석으로 달려야 한다면 웬만한 인내심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미 그러한 삶의 조건들에 오랫동안 단련이 된 중국사람들은, 그 열악한 기차 안에서 인내를 하는 것도 모자라 나름대로의 즐거움까지 찾고 있다.

어디서건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에게, 당시 내가 탔던 그 삼등칸 기차 안에서의 최고의 구경거리는 바로 '나'였다. 행색이나 생김새에서 외국인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여기저기서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는 눈들이 많다.

근처에 같이 서 있던 남자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오자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난리가 났다. "한국 사람이래, 한국 사람이래" 하는 소리가 끝좌석까지 입으로 입으로 전달이 되는 것 같았다. 저 멀리에 앉은 사람들까지 다 일어나서 나를 쳐다본다.

한국의 수도는 베이징보다 크냐, 한국 음식은 어떠냐, 한국 인구는 몇 명이냐 등등 여기저기서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한다.

"중국에 손님으로 온 외국아가씨가 이렇게 힘들게 서서 가는 게 말이 되느냐. 정말 면목 없는 일이다. 아가씨 이리로 와서 걸터 앉아!"

순박해 보이는 한 농부아저씨의 호의로 내가 그의 짐자루 위에 걸터앉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나를 에워싸며 본격적인 '심문'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어찌나 즐겁게들 웃고 떠들던지, 마치 내가 동물원의 원숭이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즐거운 기억이었다. 나에게나 그들에게나 그 힘든 기차 안에서 무엇이든 잠시라도 그 괴로움들을 잊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루종일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것이나, 할 일 없이 차나 맥주를 홀짝이며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나 신기해보이는 외국사람과 말 한마디 해보는 것이나 다 그런 즐거움들을 찾자고 하는 일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삼등칸 완행열차는 온갖 불행한 사람들의 지옥으로 변할 것이 틀림 없다.

투르판행 완행열차 안에서 부딪힌 그 퀭한 눈빛의 남자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예전 여행의 기억들이다.

서역으로 가는 야간 완행열차

이리저리 밀치는 사람들 틈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는 어느새 다른 두 일행들과 멀어지고 말았다.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도 그 사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발끝을 올려세우고 둘러보니, 선배는 배낭 위에 주저앉아 고개를 묻고 있고, 다른 한 친구는 무거운 짐보따리들을 들고서 어쩔줄을 몰라하며 선배를 일으켜 세우려 한다.

다행히 그 친구와 눈이 마주쳐서 손짓으로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나는 침대칸 표를 사기 위해 열차 안의 매표사무실로 돌진했다. 그야말로 돌진이었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쓰러지는 선배를 보니, 침대칸 표를 구하지 못했다간 오늘밤에 당장 일이 날 것만 같았다. 오직 표를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나도 다른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치며 매표소 앞에 한줄이라도 더 앞에 서기 위해 사생결단을 하듯 앞으로 앞으로 헤집고 나갔다.

열차 안 매표소 사무실 앞은 더 난장판이었다. 줄은커녕, 먼저 손을 뻗쳐 돈을 건네는 사람이 장땡이다. 사람들의 고성이 오가고 팔과 팔들이 뒤엉키면서 한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매표소 담당자가 표는 얼마든지 있으니 줄서서 차례대로 사라고 고함을 쳐도 소용이 없다.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표를 사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표가 얼마든지 있다는 그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사람들을 하나둘 제치고 드디어 나도 돈을 쥔 손을 매표구 앞으로 내밀었다. "투르판 세 장!" 그때, 돈을 받아든 두 명의 담당자들이 내가 건넨 돈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이 돈은 가짜야!"라고 폭탄선언을 한다.

뒤에서 밀치고 소리치는 사람들 때문에 당혹해할 짬도 없다. "다시 한번 봐요! 가짜일 리가 없다구요. 진짜 돈이에요 진짜!" "아가씨, 이 기계도 이렇게 가짜라고 소리를 내잖아. 표 사려면 빨리 다른 진짜돈을 꺼내든지 아니면 옆으로 비켜나요!"

내 뒤에서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노려보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 돈의 진짜가짜 여부를 따지지 못하고 얼른 다른 지폐를 꺼내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 돈들은 진짜였다. 그리고 더 다행이었던 것은 무사히 침대칸표를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또 다시 사람들을 헤집고, 이번에는 득의만면해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얼마나 많이 낙심하고 절망해 있었는지, 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도 별다른 기대를 안하는 눈빛들이다. 표를 손에 들고 흔드니 그때서야 표정이 달라지면서 짐을 챙겨든다.

침대칸이라고 해봐야 열악하기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물론 삼등칸에서 입석으로 갈 뻔했던 걸 생각하면 천국이었지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고 막상 자리를 잡고 누우니 지난번 탔던 기차와 여러 모로 비교가 되는 것이다. 실내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되어 있는데도 여기저기서 담배들을 줄창 피워대고 있고 실내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아픈 선배는 눕자마자 바로 잠에 떨어졌다. 열이 많이 나는 것 같아 걱정이다. 다른 한 친구는 아직도 조금 전의 그 장면들이 잊혀지지 않는지 계속 충격에 사로잡힌 얼굴로 노트 위에 뭔가를 끄적대고 있다. 나중에 그 노트를 볼 기회가 있어서 봤더니, 그 친구는 그날의 느낌을 이렇게 짤막하게 적어놓았다.

"아찔했던 기차 안! 간밤 기차 안은 정말이지 아찔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짧은 시간 동안 절망감이 찾아왔다. 다행히 침대칸으로 옮기긴 했으나 아래쪽 중국아줌마가 어찌나 담배를 피워대던지…."

서역으로 가는 첫 행로부터가 어쩐지 순탄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의지할 수 있는 구원군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서역은 나도 생소한 지방이라 머릿속이 뒤숭숭해진다.

그 사람들은 생김새도 완전히 다르고 언어도 안 통하고, 이슬람교를 믿어서 먹는 것도 한족과 많이 다를텐데, 신장지방에는 위구르족 분리독립주의자들이 많아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던데, 등등 온갖 사소한 불안들이 머리를 짓누른다.

나에게 가장 특별한 의미를 남긴 땅, 중국의 새로운 영토 신장으로 가는 야간 완행열차는 그렇게 아찔한 불안과 기대를 싣고 달리고 있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