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회장님의 8월 14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히고 분노가 앞섭니다. 분노를 넘어 안쓰러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광복회장의 입에서 “친일청산을 이제 그만 하자”는 말이 나올 수 있는지,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장 회장님 같은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을 가지신 분이 광복회 회장직을 맡을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장 회장님의 의견이 단순한 사견이 아닐진대, 만일 그것이 광복회의 견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6월 20일 <한겨레신문>의 '왜냐면'란에
'장철 새 광복회장께 묻습니다'(클릭!)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장 회장님께서는 동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친일 추가명단 16명 광복회와 무관하다”라거나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 선생과 여성운동가 우월 김활란 선생은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등 공이 훨씬 많은 분인데 친일파로 몰아가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또는 “친일명단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더욱이 결정적인 것은 "앞으로 광복회 차원에서 친일파 명단을 추가로 발표할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이러한 인터뷰 내용이 크게 실망스러워 저는 장 회장님의 그런 발언이 “우리 사회의 친일잔재 청산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임을 지적하고, 광복회 존재의 당위성인 '친일잔재 청산'에 매진함으로써 광복회를 모든 국민이 존경할 수 있는 단체로 이끌어주시길 당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 제 글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장 회장님께서 호되게 꾸짖어주시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광복회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제 글을 보고 광복회 취재를 한 기자들에게 전해들은 말은 “광복회에서는 더 이상 친일명단 같은 것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실망스러운 말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장 회장님의 이번의 인터뷰 내용은 마치 그때의 인터뷰는 예고편이었다는 듯이 기가 막힌 수준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먼저 “반세기가 지난 상황에서 후손들과 마찰이 있을 수 있으니 화합을 위해 친일파 청산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일파 청산은 비록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우리의 굴절된 역사청산입니다. 그것이 후손과의 마찰이 우려되니 하지 말자니요?
그 후손이 누굽니까? 보고싶습니다. 나서라고 하십시오. 제발 좀 나서서 조상의 은덕을 칭송하라 하십시오. 그런 후손과는 자주 마찰을 일으킬수록 좋습니다. 지금 너무 마찰이 없어서 탈 아닙니까?
그리고 장 회장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화합’은 어떤 화합입니까? 선대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그들의 더러운 죄의 대가로 얻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온갖 술수를 부리는 소위 이 사회의 주류(main stream)와의 무조건적인 화합입니까? 그렇게 화합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장 회장님께서는 또 “친일파 본인들은 다 죽고 후손들이 남았는데, 그분들과 마찰이 생기고 분열될 소지가 있잖아요? 그런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다 지났으니 화합하고 용서하는 게 좋잖아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다 지났다”니, 무슨 ‘시간’이 다 지나갔다는 말씀이신지요? 독립운동하셨던 조상님께서 시한을 정해놓으셨나요? 아니면 민족반역의 무리들이 정해 놓았나요? 민족반역죄에 공소시효가 있습니까? 설사 우리가 지금 하지 않더라도 후세에 누군가는 반드시 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 나라의 정기가 조금이라도 살아있다면, 지금의 우리를 원망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시간’이 다 지났으니 친일청산을 그만 하자는 말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지금 늦은 것 같아도 절대로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반드시 한번은 제대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다 지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간과하는 것입니다. 해방후 5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단죄노력은 시작한지 얼마 안 됩니다. 그동안은 ‘일제하 민족반역행위에 대한 단죄의 건’은 법률용어로 ‘기소중지’된 상태라고나 할까요?
해방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되며 친일파 청산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1공화국 내내 기소중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후 불행히도 일본육사 출신의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기소중지 상태는 계속되었고 더욱 불행히도 전두환, 노태우 같은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청산 얘기는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사이 광복회조차 친일청산을 위해 아무런 활동도 하기 힘들었다는 것은 장 회장님께서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민간에 의한 조직적 친일파 청산 노력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1991년에 만들어진 것이 민족문제연구소 아니었습니까?
말하자면 해방 후 반민특위의 노력이 실패한 이후의 40년 가량의 ‘시간’은 ‘기소중지’ 중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친일파 청산에 들어간 ‘시간’은 고작해야 20년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한명 죽여도 ‘시간’이 15년입니다. 하물며 제 나라 제 민족을 배반하여 수없이 많은 동족을 잡아 고문하거나 사지로 몰아넣고 나라의 혼을 팔아먹는데 혈안이 되었던 그들에 대한 단죄를 이제 겨우 20년 만에 그만 두자니요. 그것이 광복회장의 입으로 차마 할 수 있는 말입니까?
그리고 용서하는게 좋다는 말씀 이해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서하기 전에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민족 행위자 또는 그 후손의 사죄와 반성입니다. 그럴 때만이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지금 무엇이 이루어져 있습니까? 그들은 장 회장님 말씀마따나 다 사망했고, 뉘우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으로부터도 선대의 잘못을 사죄했다는 얘기는 잘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파인 김동환의 아드님이라든지 이항녕 교수라든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그런데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용서한다는 말입니까?
장 회장님의 발언에 대해 일일이 반론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만 두겠습니다. 그러나 장 회장님의 발언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입혔다는 것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알아도 앞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그 작업이 그리 썩 바람직하게 진척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 사람들은 찬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지난 11년을 한결같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 결실로 이제 조금 빛을 보려는 순간입니다. 국회에서도 비록 소수지만 그 사업의 필요성을 인정해서 약간의 국고지원에 동의했고 ‘통일시대 민족문화재단’이라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출범한 재단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라는 기구가 공식 발족되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지금도 그곳에서 모여 친일관련 문제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사업에 대해 ‘제 2의 반민특위’ 사업이라고까지 과찬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작업에 힘을 실어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이렇게 찬물을 끼얹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렸을 적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침몰한 배에서 사투를 벌이던 목사가 하느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방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하며 절규하던 장면이 말입니다. 저의 지금 심정이 그렇습니다.
반민족 행위자들이 대부분 다 죽은 지금의 친일파 단죄와 청산은 사실 청산이라고 보기에도 한참 미흡한, 별것 아닙니다. 이미 죽은 그들을 부관참시하자거나 그들의 후손들의 재산을 몰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공민권을 제한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저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친일청산입니다. 무엇이 그리 대단합니까?
우리는 그것조차 해방 후 60년이 다 되도록 해 놓지 못했습니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그런데 그 청산이라는 것이 무어 대단한 거라고 그리 못하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것도 못해 놓는다면 당시를 살았던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가족도 돌보지 못하고 독립운동하신 분들은 만주벌판 어딘가 헤매다 스러져가고, 그의 자식들은 생활고에 찌들려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사회의 하층으로 편입되고,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들과 그 후손은 그 죄의 대가로 자자손손 고관대작 행세를 하고 떵떵거리며 살게 된다면 민족사에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전례로 굳어진다면 또 다시 이 나라에 비극이 닥쳐올 때 누가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는 이 나라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개인의 호의호식을 위해 민족을 배반한 자는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 자식들 또한 제대로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엄정한 전범을 세우는 일은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 앞의 과제인 것입니다.
겨우(?) 4년 남짓의 독일 점령 치하의 나치부역자에 대한 단죄를 끝내고 나서 드골이 했다는 “이제 우리 프랑스가 어려운 처지에 처해도 민족을 배반하는 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이 순간에 다시 한번 새겨봐야 할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장 회장님, 이제 광복회가 친일청산 작업을 중단한다니 광복회의 존립근거는 사실상 상실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후계자 승계사업에 반대하지는 않으나, 그것은 절대로 광복회의 존립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순간 ‘관용은 또 하나의 범죄’라는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숙청 때의 논리를 상기합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 공화국은 절대로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며 서슬 퍼런 단죄를 주장했던 프랑스 언론을 상기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광복회장직에서 사퇴해 주십시오. 장 회장님의 어설픈 ‘관용론’과 역사인식은 광복회에 누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장 회장님 인도하의 광복회는 그 도덕적 권위와 힘을 잃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광복회를 해방 후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 분이 반드시 계실 겁니다. 장 회장님께서야 아쉬움이 남으시겠지만, 우리나라의 스러진 민족정기와 관련된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광복회장직에서 사퇴하십시오. 그것이 광복회가 살고 친일청산이 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