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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주군 안덕면 서광리의 강정순(78)씨. 형법 제77조 위반(범죄사실:내란죄)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남제주군 안덕면 서광리의 강정순(78)씨. 형법 제77조 위반(범죄사실:내란죄)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 제주 4.3연구소
제주 4.3은 반쪽의 과거 지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역사다.

제주4ㆍ3연구소(소장 강창일)가 펴낸 <무덤에서 살아나온 4ㆍ3 '수형자'들>은 4.3 당시 군법회의나 일반 재판을 받아 감옥 생활을 한 10명의 이야기다.

'제주4.3 인권유린의 기록'이란 부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들은 법률적 도움 없이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들로서 실제 '수형자'가 아닌 '불법 감금자'로 살았다.

짧게는 1년, 길게는 14년 동안 '수형' 생활을 한 4ㆍ3 생존자의 증언을 담은 이 채록집은 '이제는 말햄수다' 1, 2권 시리즈(89년)의 제 3권으로 펴냈지만 4.3 당시 '수형'생활을 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증언자 강정순(78ㆍ남제주군 안덕면 서광리), 이보연(74ㆍ제주시 이호동), 김춘배(78ㆍ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씨 등 3명은 1948년 12월 3일부터 29일까지 14차에 걸쳐 열렸던 제 1회 군법회의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을 했다.

양근방(71ㆍ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 강상문(76ㆍ제주시 월평동), 부성방(88ㆍ조천읍 조천리), 양경찬(79ㆍ제주시 아라2동), 정기성(82ㆍ남원읍 신례리) 등 5명은 1949년 6월 21일부터 7월 7일까지 11차에 걸쳐 열렸던 제 2회 군법회의에서 징역형을 받았다.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의 양규석(81)씨. 4.3이 일어난 해인 1948년 5, 6월께 아버지와 함께 지붕에 이을 새끼를 꼬다 마을 경찰관의 집을 방화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이후 험난한 인생역정을 살았다.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의 양규석(81)씨. 4.3이 일어난 해인 1948년 5, 6월께 아버지와 함께 지붕에 이을 새끼를 꼬다 마을 경찰관의 집을 방화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이후 험난한 인생역정을 살았다. ⓒ 제주 4.3연구소
강서수(77ㆍ조천읍 북촌리)와 양규석(81ㆍ안덕면 화순리)은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선포된 비상계엄령 이전에 검거돼 1948년 8월말 광주형무소로 이관돼 광주지법에서 일반재판을 받았다.

당시 제 1회 군법회의에서 사형이나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는 871명, 제 2회 군법회의에서는 1659명에 이르렀다.(박찬식 저, <한국전쟁기 제주 4.3 관련 수형인 학살의 실상> 20, 30쪽).

그리고 일반재판에 회부된 212명(<독립신보> 1948년 9월 3일자)의 기록도 나와 있다.

중산간 마을과 해안가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던 무지렁이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채 인권을 유린 당하고 반세기를 넘게 살아왔다.

이 책은 당시 생존자들이 당한 고문의 실상과 허술한 사법처리 절차를 거쳐 수형생활을 한 내용을 담았다.

또 그들이 받은 재판이 얼마나 불법적인 야만행위였는지, 가족들이 죄 없이 살해당한 상태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그들이 겪은 고문과 수형생활이 얼마나 모질고 험악했는지를 절절히 깨닫게 한다.

제주 4.3 연구소 채록팀(팀장 제주대 유철인 교수)은 "4.3 당시 희생된 모든 분들과, 육지형무소로 보내졌으나 돌아오지 못한 숱한 영혼들, 그리고 끝끝내 살아남아 야만의 세월을 증언해준 분들께 4.3 해결의 염원을 담아 이 책을 바친다"고 표지에서 밝혔다.

현기영 제주 4.3연구소 이사장은 발간사를 통해 "살아남은 자들의 파편화되고 죽어있는 개인 기억들을 증언을 통해 활발히 되살리고 사회의 집단기억으로 보변화함으로써, 극우 가해 세력에 의해 왜곡, 편집되어진 과거 역사를 수정, 재해석하는 일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말했다.

수개월에 걸친 모진 고문끝에 광주지법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던 양경찬씨.

"그 후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는 일체 가지 않아십주(않았어요)".

경제적 수탈장소에서 주민 수용소로
4.3 당시의 제주주정공장

▲ 4.3 당시의 제주주정공장

1948년에서 1949년 군경은 체포되거나 귀순한 제주도민들을 이곳 제주주정공장에 수용했다.

일제강점기 때 동척회사로 제주도민들을 수탈했던 장소는 4.3 때 수용소로 바뀌어 또 다른 형태로 제주도민들을 괴롭혔다.

4.3 당시 제주도민 수천명은 이곳에 감금된 채 갖은 고문과 폭력에 시달리다가 형식적인 재판을 거친 채 다른 지방 형무소로 이송됐다. 이들 대부분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찍은 것이다.

(촬영:1952년 7월 8일 미육군 제226통신중대 Clifton Lewis.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본관리청.) / 양김진웅

덧붙이는 글 | <차례>

강정순-시집 잘못 간 죄가 내란죄?
이보연-쌀 한 되랑 돈 30원 내었다고 했어
김춘배-당신은 시효가 없소
양근방-말해서 몰라, 내가 겪은 세월을
강상문-누가 보상을 하라는 사람이 이수과?
부성방-판검사 얼굴 한번 본 적 없어
양경찬-우리 나인 고생만 헌 거라
정기성-하늘이 도운 목숨, 법이 앗아간 인생
강서수-안 받아본 고문이 없는 사람이야
양규석-사람 있는데는 안가

역사비평사刊. 272쪽. 1만원.


꽃 파는 처녀 2 - 북한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소설

생각하는손 편집부 엮음, 생각하는손(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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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대자(大者)는 그의 어린마음을 잃지않는 者이다' 프리랜서를 꿈꾸며 12년 동안 걸었던 언론노동자의 길. 앞으로도 변치않을 꿈, 자유로운 영혼...불혹 즈음 제2인생을 위한 방점을 찍고 제주땅에서 느릿~느릿~~. 하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 아이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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