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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오’하면 그의 동생 ‘황인혁’, ‘황인욱’과 더불어 8,90년대의 험난한 세월을 보내온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아직도 그 자리매김을 하지 못한 ‘사북항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우리는 ‘황인오’에게 갚지못한 역사적인 빚이 있는 느낌이다. 지난 8월 21일 부터 프리챌의 ‘80518 (http://www.freechal.com/80518)’ 게시판에 ‘사북으로 돌아가다’라는 ‘황인오’ 본인의 ‘사북항쟁기’를 연제하기 시작했다.
다음카페 ‘광주민주항쟁 80518 (http://café.daum.net/80518)’ 민주 게시판에도 동시에 연재되고 있는 이 사북항쟁기에는 사북출신의 광부로서 ‘황인오’가 직접 목도한 사북항쟁의 원인과 시작 그리고 전개과정 등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 사북항쟁을 통해 일개 평범한 청년 ‘황인오’가 험난한 80년대의 중심에서 전두한 살인집단과의 처절한 투쟁에 뛰어들게 될 수밖에 없는 곡절들이 자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탄광지역에서 자행되었던 노동착취의 생생한 모습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고 군수 부럽지 않은 부와 권력을 누리는 어용 한국노총산하 동원탄좌 노조지부장의 행패와 ‘암행독찰대’와 같은 관리직원들의 상식을 초월하는 전행들이 그려지고 있다.
이 ‘사북항쟁기’에 의하면 사북항쟁은 노조지부장과 노조원의 갈등에 편파적으로 개입한 경찰이 노조지부장을 피신시키는 과정에서 노조원을 경찰짚차로 사망시키면서 1980년 4월 21일 촉발되었고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1) 지부장을 비롯한 노조간부의 완전퇴진과 직선제 실시, (2) 임금협약 무효화하고 임금 총액 40% 인상과 상여금 450% 지급, (3) 암행독찰대 폐지, (4) 계장급 이상 간부 전원 사퇴, (5) 이번 사태에 대한 민, 형사상 책임을 일체 묻지 말 것 등 10여 개 항을 당국에 요구하며 만 4일간 사북해방구를 유지한다.
전화 한 통으로 인한 ‘황인오’의 ‘천영초’, ‘정문화’, ‘인명진’, ‘고희범’, ‘이소선’, ‘황광우’, '조성오’, ‘정인숙’등과 같은 민주화세력들과의 인연이 소개되고 있고 전두환세력이 무력진압을 위해 열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영월에 11공수부대가 진주했다는 내용이 주목할만 하다.
당시 11 공수여단의 하사관으로 장기복무 중이던 ‘황인오’의 당숙의 증언을 통해 1980년 4월 22일과 23일 부대원과 함께 영월에 대기하며 사북투입을 준비했고 1980년 5월에 광주에 투입되어 명령(?)을 수행하고 올 초 사망하기까지 당시의 악몽에 시달렸다는 ‘황인오’의 당숙은 사북에 투입되면 ‘황인오’와 그 가족부터 찾아 피신시키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황인오’의 추리에 의하면 당시 전두환세력는 12.12 직후부터 집권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길 빌미를 찾고 있었던 것이고 사북항쟁에 대한 보도를 일체 통제하다가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던 23일 저녁 9시 뉴스에 KBS를 필두로 ‘사북소요사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사건의 원인과 경과보다는 광업소 본부 구내 예비군 무기고에 수천 정의 소총과 수십만 발의 실탄이 보관되어 있고 인근 채광용 화약저장고에 있는 1700톤의 다이너마이트가 난동광부들의 통제 아래 들어가 있다는 것을 집중 조명하면서 사북항쟁을 호도했다고 적고 있다.
77년의 이리 폭발사고 때 45톤의 화약이 폭발한 것에 비교해 난동광부들의 수중에 있는 1700톤의 폭발물의 위력을 되풀이하여 비교하여 광부들 스스로도 그런 무기와 폭발물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도 방송 보도를 보고서야 비로소 의식했을 만큼 노동자들의 큰 관심을 끌지 못한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노조 지부장 린치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사태가 일어난 과정은 도외시하고 노동자들의 폭력성을 집중 조명하는 등 사태의 악화와 불안감을 부추기는 내용으로 일관하였다는 것이다.
‘황인오’는 이러한 분위기 조성을 마친 뒤에 사북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유혈진압을 한 뒤에 정국을 장악하려 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다만 사북이 너무 오지이고 아직 대학가의 움직임이 학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등 유혈진압을 감행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판단으로 일단 사북에서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고 5월의 광주로 계획을 연기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설득력 있는 해석도 곁들이고 있다. ‘황인오’는 그 로인해 사북 대신 피로 물들인 광주에 미안한 감을 여러 곳에서 피력하고 있다.
‘사북항쟁기’에는 정부의 사북조사단의 사실상 리더로 보이는 당시 경제기획원 과장으로 지금은 미국으로 도피중인 전 정보통신부장관 ‘이석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광업소가 정상적으로 재가동한 것은 사태 발생 만 1주일이 지난 28일경부터였다고 적고 있다.
1980년 5월 8일 오전 9시 반, 약속을 어긴 검거선풍을 피해 극적인 ‘황인오’의 사북탈출과 ‘김철’의 ‘통일사회당’과의 인연, 그리고 ‘광주항쟁’당시의 서울과 부산의 표정, '이창복’, ‘천영초’등의 협조로 사북구속자들에 대한 실태파악과 생계지원을 위한 제 1차 사북잠입, 그리고 1980년 6월 9일 신촌로타리에서 있었던 김종태 열사의 광주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분신감행 등을 소개한다.
전두환살인집단의 광주학살에 대한 항의와 규탄의 뜻으로 내한 공연을 취소한 세계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이야기와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광주의 피비린 냄새가 가시지 않은 나라에서 어떤 형태로든 미스유니버스 대회 같은 유흥행사를 취소하거나 보류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 대회저지를 위한 준비작업으로1980년 6월 26일 사북 제2차 잠입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선배의 사촌 동생이자 후배의 밀고로 체포되어 받은 간첩누명과 가지가지의 고문, 그리고 남영동 대공수사대의 ‘박처원’, ‘이근안’등 고문기술자들과의 조우와 남영동 대공분실 감시역 최모(최용규?)전경에 대한 고마움도 소개하고 있다.
‘황인오’의 ‘사북항쟁기’는 전두환세력에 의한 20년의 구형의 사연과 구치소내의 정치범들에 대한 삼청교육확대음모 저지에 대한 내용등을 다루면서 8월 25일 현재 16회분을 연재하고 있으며 독자등의 격려에 “상처가 없달 수는 없지만 한번도 희생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귀중한 역사의 현장에 참여한 데에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미흡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화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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