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이 장기수에게 행했던 사상전향공작의 비인간적인 실체가 의문사진상규명위의 활동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위원장 한상범, 아래 의문사위)는 29일 1970년대 교도소에서 사망한 최석기, 박융서, 손윤규씨가 당국의 전향공작 과정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들 사건은 의문사위에 진정된 5건의 장기수 옥중 사망 사건 중 일부다.
61년 출범 이후 줄곧 좌익수를 관리해온 중앙정보부는 법무부와 공조, 73년 8월 6일 대전·대구·광주·전주 등 전국 4개 교도소에 전담반을 설치, 전향공작을 강화했다. 앞서 법무부는 73년 6월 5일 '전향공작 전담교회사'를 공개 채용했다. 이 때는 53∼55년 사이 구속, 무기징역을 살던 좌익수의 상당수가 60년 4·19 혁명 이후 20년형으로 감형을 받고 출소를 앞둔 시점이었다.
의문사위는 "최석기씨는 74년 4월 4일 대전교도소의 좌익수형자 특별사동 내 격리사동 1방에서 폭력사범 조모씨 등으로부터 전향을 강요받으면서 입에 수건이 물린 채 몸 전체를 구타당하는 등 극심한 가혹행위를 당했고 이날 저녁 8시 5분에 사망했다"라고 밝혔다.
이는 당시 격리사동에서 순찰근무를 했던 교도관 전모씨 등 교도관 2명과, 비슷한 시기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수형자 3명의 진술을 종합한 결과다. 그러나 당시 교도소는 최 씨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사건을 은폐했다.
의문사규명위에 따르면, 대전교도소는 73년 8월 6일 전향공작반을 구성했고 격리사동 중 1방을 일반수형자로 하여금 좌익수형자를 폭행해 강제로 전향시키는 장소로 활용했다.
박융서씨는 "74년 7월 19일 격리사동 1방에서 사방청소부 이모씨와 교도관 김모씨에 의해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고문을 당했고, 다음날인 20일 새벽 자신의 방에서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목과 허벅지의 동맥을 절단해 자살"했음이 의문사규명위 조사 결과 밝혀졌다. 또한 사체를 발견한 당시 벽에는 '전향 강요말라'는 혈서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대전교도소장 이모씨 등과 중앙정보부 박모씨는 전향 강요 행위로 인한 자살임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사후 합의했다"고 의문사위는 지적했다.
이밖에 대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손윤규씨는 76년 3월 24일 전향을 강요하는 폭행에 항의해 단식투쟁을 시작, 4월 1일 교도소 측에 의해 강제급식을 당한 후 건강상태가 급속히 악화돼 저녁 7시께 결국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의문사위는 "대구교도소의 전향공작 전담반 요원들은 좌익수를 폭행해 백지에 지장을 찍게 하고 내용은 임의로 기재해 전향실적을 올렸다"고 설명했다.
한편, 의문사위는 이들의 죽음이 민주화운동과 관련성이 있는지 여부는 추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인권하루소식 2002년 8월 30일자(제21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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