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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8월이 갔습니다. 어려움이 많았던 달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훌렁 가버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전국적으로 유난히도 수해가 컸던 올해의 8월은 내게도 꽤나 슬픈 달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9월 초,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니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우수(憂愁)도 괜히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8월 7일 급히 공주를 다녀왔습니다. 아내의 친척 한 사람이 42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지요. 공주 지역의 재계에서 선두 주자 소리를 듣는 건설회사의 부사장이었던 그 사람이 중3인 아들과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을 두고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했지 뭡니까.
저녁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메슥거린다고 바늘로 오관도 따고 소화제도 먹고 하다가 자정이 넘은 시각에 공주의료원엘 가서 자기 발로 안으로 들어갔는데, 원인을 알기 위해 심전도 검사를 실시하는 도중 6일 새벽 1시 30분 경 순간적으로 숨이 멎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우선 금강변의 장의예식장으로 가서 문상을 한 다음 처가로 가서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망인의 부모님을 찾아뵈었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더군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도무지 갈피가 서지 않고…. 내외분이 동갑이라는, 내년에 고희를 맞으신다는 그분들의 졸지에 외아들을 잃은 쓰라린 심정을 내가 어찌 측량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오후 3시에 '입관예배'가 있다고 해서 아내를 다시 장의예식장에 태워다주고 빗길을 달려 태안으로 돌아오면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또 다시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었지요. 정말 그 시간이 언제 닥쳐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등의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는 성서 속의 현명한 신부의 모습을 떠올리며….
죄될 소리일지 모르지만, 아내와 유난히 다정하게 지냈다는 그 사람이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이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긴 하지만 일순간에 '해결'된 그 깨끗한 죽음이 나로서는 은근히 부럽기도 하더군요. 자신도 전혀 고생을 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조금도 노고를 끼치지 않고, 어떤 교통사고처럼 험한 주검도 되지 않고, 그렇게 '간단히' 숨이 멎은 것이 어찌 보면 참 복된 일일 것도 같았습니다.
통풍과 당뇨라는 심각한 질환과 씨름하며, 지속적인 많은 약물 복용으로 오장의 손상을 늘 걱정하며 살고 있는 내 처지에서는….
공주와 청양 사이 두 군데에서 차들이 몹시 밀리기에 무슨 사고가 났나 했지요. 그런데 이윽고 사고 지점에 다가가서 보니, 교통사고가 아니라 수해 사고였습니다. 물이 도로 위로 강물처럼 넘치고, 또 산사태가 나서…. 그런 광경에서도 죽음과 관련하는 뭔가를 다시 느낄 수 있었지요.
빗길 운전, 저녁 운전이 그날 따라 유난히 조심스러워지더군요. '무사히' 집에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이상스럽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자정을 넘기고 꼭두새벽을 지나 이른 새벽에 이르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만큼, 실로 많은 생각들이 수없이 벌불졌고…. 생각이 많아서 잠이 오지 않는 건지, 잠이 오지 않아서 생각이 많아지는 건지, 원….
어렸을 때부터 사람의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천주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탓이었지요. 텔레비전은 아예 없었고,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이었답니다. 성당(당시엔 공소)에 가면 혼자 생활하시는, 우리가 '복사님'이라고 부른 할아버지 방에 앉아서 '순교 성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낙(?)이라면 낙이었지요.
순교 성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순교 장면이 압권이었지요. 순교자들은 갖가지 숱한 고문 끝에 '죽음의 강'을 건너가게 되는데, 처형 방법이 여러 가지더군요. 우리나라(조선)에서는 교수, 참수, 육시, 생매장에다가 옥에서의 병사와 아사, 장독(杖毒)에 의한 죽음도 많았지요. 외국에서는 십자가형과 화형이 많았고, 사자에 의한 죽음도 있었고….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어린 가슴에 무서움과 끔찍함 속에서도 스릴과 감동을 주었던 듯싶습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죽음의 강 저편의 세계에 대해서 일찍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죽음에 관한 꽤나 구체적인 생각의 '기틀'이 일찌감치 내 가슴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말도 가능할 듯싶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만장 들기로 초상집의 장례를 거들고, 고등학생 때부터 시신을 만지며 염을 하고, 군대 시절에는 월남의 전장에서 무수한 주검들을 보고 접한 나는 어느덧 오후의 한 중간쯤으로 접어든 오늘까지―참으로 덧없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인간의 덧없는 삶과 죽음의 강 저편의 세계에 대해서 실로 많은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 허무의 본질적 가치를 보듬어 안는 '겸허'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명제임을 깨닫곤 했지요.
요즘 들어 나는 언젠가는 내가 건너가야 할 '죽음의 강'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인의 죽음 때문에 공주를 다녀온 그날 밤은 실로 더욱 생각의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런데 나는 불과 며칠 전인 8월 24일 당질 한 사람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올해 나이 36살, 건장한 체격에다가 친구들 사이에 '의리의 사나이'로 통했던 내 당질이 33살인 아내와 열 살과 다섯 살인 아들 형제를 남겨두고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당질의 죽음을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 없고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젊은 사람이 간암도 아닌 간경화라는 병에 걸려서 투병 생활을 1년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세상을 하직하고 말다니….
당질의 간경화는 술로 얻은 병이었습니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데다가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자주 폭음을 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지역에서 유명한 청년 단체의 회장도 하며 사회 활동 폭이 컸던 당질은 그만큼 친구도 많았지요. 그런데 마음이 너무 좋은 것이 탈이었습니다. 친구들이 빚을 얻는 일에 보증을 서주곤 한 것이 그만 탈이 되어 무려 7천 여 만원의 보증 빚을 뒤집어썼다고 하더군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어 부모에게 의존하여 보증빚을 갚는 과정에서 부모의 질타도 많았겠지요. 당질의 아버지인 내 사촌형님은 그 세대의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이 고생고생하며 자수성가한 분이니, 전혀 고생이란 게 뭔지도 모르고 자란 아들로부터 오는 실망과 스트레스도 컸을 터이고….
지난해 겨울 어느 날 사촌형수님으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고 가서 보니 간경화라는 병을 얻은 당질은 복수(腹水)까지 찼고, 형편없는 모습이더군요. 내가 알고 있는 병원은 어머니가 대장암 수술을 받고 퇴원한 대전성모병원뿐이어서 당질을 태우고 서둘러 대전으로 달렸지요.
상태가 좋아져서 열흘만에 퇴원한 당질은 처음 한두 번은 남이 운전하는 차를 이용하였으나 다음부터는 손수 운전으로 병원을 다녔고, 처음엔 보름 간격으로 가던 것이 차차 한 달 간격으로, 두 달 간격으로 병원에 가게 되었지요.
상태가 좋아졌으니 두 달에 한 번씩 오라는 의사의 말에 당질은 방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간경화는 간암과 달라서 완전히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거의 나은 것으로 잘못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8월 15일은 해마다 모교(중학교)에서 동문 체육대회가 열리는 날이지요. 당질은 그곳에 가지 말라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앉아서 구경만 할 거라며 기어이 가고 말았지요. 처음 한동안은 약속대로 구경만 했으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충동을 못 이긴 탓인지 그만 배구경기장에 몸을 넣었고, 종래엔 축구경기에도 참여를 하고 말았지요.
저녁 회식 자리에서는 생선회를 먹고 요즘엔 독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삐뚜리 고동'도 먹었다고 하더군요. 뿐인가, 밤늦도록 술도 마셨고….
이런 사실 때문에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당질에게 '미련한 놈',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자기에게 딸려 있는 처자와 부모 생각도 해야지 어쩌면 그리도 무모할 수 있느냐는 얘기들이었지요.
"열 친구 중에 똑바른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산다"라는 말로 당질의 친구들을 원망하는 말도 들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당질의 무리한 운동과 음주를 만류한 친구가 왜 한 명도 없었겠습니까. 당질이 친구들의 만류를 듣지 않고 오히려 화를 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날 밤부터 당질은 설사를 심하게 했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피를 토하기도 했답니다. 그런 상황이면 즉시 병원으로 달려가야 할 터인데도, 당질은 따로 사는 부모에게 들켜 야단맞을 것을 걱정하면서 그것을 쉬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5일이 병원에 가는 날이니 그날까지 참아보기로 했다는 겁니다. 자신의 몸에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러다가 견디지 못한 당질은 19일 새벽에서야 택시를 불러 타고 대전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때는 내가 먼길 출타 중이어서 내 승합차를 이용하지 못한 탓에 비좁은 택시 안에서 먼길을 가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18일 출타를 했다가 20일 오후에서야 집에 돌아온 나는 대전성모병원에 가 있는 사촌형수님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순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너무 피곤하여 움직이지를 못하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아내와 함께 사촌형님을 태우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12시 중환자실 면회 시간에 당질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질의 입에는 산소호흡기가 물려 있었고, 이미 눈동자가 풀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당질을 보는 순간 소생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 순간 나는 당질의 영혼을 생각했습니다. 서둘러 당질의 영혼을 구해야 하는 것은 천주교 신자인 나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지막 순간에 '대세(代洗)'를 해준 경험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나는 사촌형님과 형수님에게, 그리고 당질며느리와 작은 당질에게 내 뜻을 말했습니다. 평소 나에 대해서 각별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내 뜻을 받아들여주었습니다.
나는 중환자실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원목실에 전화를 하였고, 점심 시간임에도 수녀님 한 분이 '성수(聖水)'를 가지고 속히 내려오셨습니다. 수녀님은 환자에게 의식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중요 교리 몇 가지를 설명한 다음 세례 받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산소호흡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없으니, 고개를 끄덕여보라는 주문이었지요.
그 순간 나는 몹시 긴장이 되더군요. 당질이 만일 고개를 가로젓거나 끝내 끄덕이지 않으면 어쩌나, 정말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질은 고개를 끄덕일 기력조차 없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 순간 당질며느리가 남편의 손을 잡고 얼굴 가까이 대고 말하더군요.
"정흠 아빠, 고개를 끄덕이기가 어려우면 눈을 한번 감아봐요. 세례를 받을래요?"
그러자 당질은 눈을 감으며 아주 작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마음 속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외쳤지요. 정말로 당질이 고맙고 대견스러웠습니다. 그 순간의 감격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수녀님은 당질의 영세명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내게 물었고, 아내가 얼른 '스테파노'로 하자고 했습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어 있는 분이지요. 수녀님은 곧 당질의 이마에 성수병의 물을 부으며, 그리고 스테파노의 이름을 부르며 대세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이윽고 중환자실을 나온 우리 가족은 한참 후 환자의 상태를 보고 나온 의사를 만나 확실한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환자의 몸에서 소변 배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질이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심한 출혈로 정상인의 5분의 1밖에 혈액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혈액이 제대로 몸 안을 돌지 않아서, 즉 장기들에 혈액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서 콩팥이 손상되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콩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서 소변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라며….
끝내 콩팥이 돌아오지 않아서 소변 배출이 계속 안 되면, 몸 안에 노폐물이 쌓이게 되면 이삼일 안으로 운명할 수 있으니, 준비를 하라는 얘기….
이때부터 사촌형수님과 당질며느리는 의사 선생님에게 애원도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지요.
19일 새벽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일시적으로 심장이 멎어 충격 요법에 의해 숨을 되찾았던 당질은 우선 혈액부터 보충한 다음 백만원짜리 주사도 맞고, 의료진이 모든 방법을 다 썼지만, 콩팥 기능 상실로 간부전마저 진행되는 단계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날 밤 또 한 분의 사촌형님과 당질의 열 살 된 큰아들을 태우고 집에 왔다가 이틀 후인 23일 아침에 다시 대전엘 갔습니다. 그리고 24일 아침 당질의 임종을 보았습니다. 아내의 가방에서 여벌 묵주를 꺼내어 당질의 손에 감아주면서 삼십대 중반의 당질이 왜 그렇게 삶의 커브를 급하게 틀어버렸는지, 조금은 미운 생각 때문에 애석하고 슬픈 마음이 더욱 커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질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를 선도하여 아침에 서둘러 태안으로 돌아오는데, 차 안의 백미러 속에서 보이는 사촌형님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더군요. 노년의 세월로 접어들어서 어이없게 아들을 잃은 사촌형님의 쓰라린 심정을 내가 어찌 측량이나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에는 이런저런 슬픈 일, 얄궂은 일도 많기 마련인가보다는 생각이나 겨우 할밖에….
약물이 많이 투입된 시신 상태를 고려하여 그날로 염습을 한 다음, 시퍼렇게 살아 있는 부모를 두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사람 장례식에 격식을 다 갖추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는 다수 의견에 따라 2일장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삼우제를 지냈습니다. 정식으로 삼우제를 지내야 하는 날은 당질 할아버지의 기일이기도 해서….
그런데 하루 앞당겨 삼우제를 지낸 26일은 사촌형수님의 생신일이었지요. 아침에 나는 우리 집 달력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촌형수님의 생일 표시를 보고 더욱 가슴이 아팠답니다. 자신의 생일날 아들의 삼우제를 지내는 사촌형수님의 슬픔을 내가 어찌 측량이나 할 수 있을지….
묘소 풍경은 너무도 쓸쓸하더군요. 서른세 살에 과부가 된 당질며느리의 모습도 볼수록 애처롭고, 아버지를 잃은 열 살 다섯 살 어린 형제들의 세상 모르는 모습을 보는 것도 가슴 아프고….
오는 9월 7일(음 8, 1)은 큰아들을 잃은 내 사촌형님의 65회 생신일 입니다. 해마다 형님의 생신에는 친족들이 모여 아침식사를 함께 했는데, 올해는 아무래도 건너뛰게 될 것 같습니다. 형님 댁에 가지 않으면 전화라도 드려야 할텐데 무슨 말로 생신 인사를 해야 할지 아직은 난감한 마음뿐이군요.
요즘은 죽음 자체보다도, 나는 어떤 형태로 죽게 될 것인지, 그 마지막 '상황'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공주의 그 처친척처럼 아무 고통 없이 순간적으로 죽음을 '해결'할 것인지, 당질처럼 병상에서 신음하며 뇌사상태까지 겪다가 죽음의 강을 건너가게 될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병석에서 가족들까지 생고생을 시키다가 겨우겨우 죽음의 산맥을 넘어가게 될 것인지, 은근히 궁금해지는 마음이곤 합니다.
아내와 함께 각막 기증, 장기 기증, 시신 기증까지 다 해 놓고 늘 죽음을 대비하며 하늘 우러르면서 살기는 하지만, 사후의 내 몸에서 온전히 각막 기증 장기 기증 등이 잘 이루어질지도 은근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기도도 합니다. 언젠가 내가 죽게 될 때는 가족들 고생 안 시키고 나도 고생 안 하고 비교적 편하게 죽고 깨끗한 주검으로 남아서 각막 기증 장기 기증이 온전히 잘 이루어짐으로써 덕을 보는 사람들이 꼭 생겨나고, 내 시신이 의과대학의 해부실습용으로도 쓸모가 많은 상태가 되기를 비는 기도….
그리고 오래 고생하는 아주 고통스러운 죽음자리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것 역시 하느님의 뜻(은혜)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잘 감내하게 되기를….
덧붙이는 글 | 두 사람의 죽음에 관련하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기술한 것은 독자님들의 건강 관리에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너그러운 해량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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