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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단편 <시취>({창작과비평} 2001 가을)는 죽음의 문제를 제재로 하고 있지만 대단히 가벼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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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 노인이 한 명 있다. '간신히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있을 뿐인, 가족 하나 없는 병들고 왜소한 중늙은이'이다. 형제들이 있지만 절교한 상태이며, 두 번의 결혼 경력이 있지만 모두 이혼했다. '타존재에 대한 거친 이물감'이 궁극적인 이유이다. 현재 그는 '완전히 칩거의 생활을 선택'한 상태이며 '살아 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의 경계가 서서히 희미해져 가고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 그가 외부 세계로 손을 뻗어 본다. 열일곱 살 고등학생 때 알게 된 후 38년만에 한 차례 만나 식사를 한 적이 있는 p의 생사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특급열차 탈선 사고 소식을 뉴스에서 본 뒤로, p가 그 열차에 탔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에게 줄곧 편지를 보내주는 p의 아들의 글을 통해 p가 죽지 않았음을 알게 되지만, 혼미한 기억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p가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매일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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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취>의 세계는 대단히 특이하다. 주인공의 면모 자체가 일상적이지 않으며, 그와 p의 관계 또한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p의 아들이 꼬박꼬박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도 이에 해당된다). 실상 이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기호에 불과하다. 죽음에 대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작가=서술자의 상념이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이고 인물들은 그러한 상념이 작품 속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기호적 거멀못에 불과한 셈이다.

이러한 판단은 이 작품의 언어적 구조에서 그 근거를 갖는다. <시취>는 단성적인데, 단 하나의 발화 주체만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이 점이 두드러진다. 서술자의 목소리만으로 작품이 채워져 있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 노인의 생각이 개진되기도 하지만, 서술자와 구별·대립되는 그만의 목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생각과 서술자의 생각이 사실상 동일한 까닭이다. 그가 대상화될 때조차도, 그러한 대상화의 내용은 그의 자기 반성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 작품이 죽음에 대한 하나의 상념으로 이루어졌으며 실상 그 상념이 주인공이라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일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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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취>의 빼어난 점은, 짜임새 있는 문체를 통한 묘사의 치밀함에 있다. 정신이 왔다갔다하는 노인의 심리가 그에 걸맞는 느린 호흡으로 차분히 그리고 꼼꼼히 그려져, 그의 심리가 생생히 와 닿는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같은 작품이 보였던 문체상의 거침과 구성상의 엉성함 등이 다른 작가의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시취>는 이 점에서 뚜렷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인물의 존재 자체가 모호한 것과는 반대로 심리의 생생함이 이렇게 뚜렷한 것은, 앞서 말했던 대로, 이 작품의 지향이 죽음에 대한 상념에 닿아 있는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시취>는 분명 잘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분량은 다소 많은 것 같아도, 단편소설로서 잘 짜여진 작품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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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시취>는 대단히 가벼운 작품이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다루는 기술 자체가 대단히 조밀하게 이루어졌음에도 이 작품은 가볍다. 제재와 방법이 가져올 무거움이 배제된 까닭은 무엇인가.
'죽음'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해석의 틀이 사회성을 제거한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며, 그 결론적인 내용이 실제의 무게를 벗어난 추상 차원 곧 기호의 차원에서 마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그에게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죽음의 껍데기에 불과한 그에게. 그를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p도 마찬가지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p또한 그와 같은 체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p의 삶이나 죽음, p의 고통이나 안락은 실제가 아니라 그의 인식상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가 p를 몰랐다면, 이 세상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만난 일이 없이 완전히 모르는 사람으로 지냈다면 p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 존재하지도 않은 것이다."(인터넷 창비 e-book, 28~9쪽)

사실 p의 삶이나 죽음 등이 의미를 갖지 못함은 정확히 말해서 (서술자에 의해) 죽음의 껍데기로 규정된 '그'에게 있어서뿐이다. 하지만 위의 인용은 이러한 점을 교묘하게 숨기고 있다. 세 번째 문장이 '그를 통해서'라는 단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끝의 두 문장은 실상 일반론의 색채를 한껏 띠고 있다.

주인공과 서술자의 비분리, 달리 말하자면 그의 상념에 대한 서술자의 무반성으로 해서, 'p의 존재의 무의미함'이라는 것이, '그'에게서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그러한 것처럼 읽힌다. 여기서는, 자신의 아들 내외 등과 p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이나 살아 있는 존재로서 그녀가 맺을 수밖에 없을 다른 끈들이 모두 휘발되어 버린다. 오직 p를 생각하는 '그'와 서술자만이 그녀의 존재 문제를 다루는 데 충분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누락이야말로 '죽음'의 문제에 대한 서술자의 생각이 반성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이 위에서 <시취>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죽음이란 그 경계가 모호한 것이어서 기뻐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며 살아 있는 듯 죽어 있으며(그의 경우) 죽어 있는 듯 살아 있기도(열차에 탔다고 가정한 p의 경우) 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기호로 표현될 뿐인 삶과 죽음의 표피적인 결과에 그리 연연할 일은 아닐 것이다."(29쪽)

'표피적인'이라는 한정을 달아 사태를 다소 모호하게 이끌어가고는 있지만, '삶과 죽음의 결과가 단지 기호로 표현될 뿐'이라는 생각은 매우 가벼운 것임에 틀림없다(한 번 더 달리 읽어, '단지 기호로 표현될 뿐인'이 '한정'으로 쓰였다고 본다면, 그렇게 한정되는 만큼 <시취>의 생명력이 줄어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리를 해 두자. 이 가벼움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관념성에 말미암는다. 온갖 절차를 지닌 의례를 낳아온 죽음이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한 개인의 주관과 기억 속의 문제로 환치하는 관념적 변용에서 <시취>의 가벼움이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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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취>의 가벼움은 아쉽다. 모든 것이 기호놀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대단히 유서 깊은 것이지만 '철학적 실재론에 반하는 모든 사유의 전통들' 또 한편 대단히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다. 인생이야말로 한바탕 꿈처럼 덧없는 것이라는 속화된 허무주의와 내가 없다면 세계도 없는 것이라는 지독한 관념론을 낳는 유아주의(唯我主義)에 연결되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더 나아간 점이 별로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처럼 가볍게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 자체가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되돌아보게 해 주는 점에서 자신의 의미를 갖는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죽음 속에서 살고 있는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형상화한 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의미를 사 줄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문제를 형상화하면서 타인과의 사회적 끈을 희미하게 해 버렸다는 점(혹은 더 나아가서 달리 보았을 때, 사실 죽음이 아니라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실상 기호 차원에 불과한 것이라는 데서 <시취>가 갖는 의미를 찾을 여지를 갖췄다는)에서, 이 가벼움의 의미를 좋게만 보기는 힘들다. 주관관념론의 자리에 서지 않는다면, 삶도 죽음도 또한 그것들의 의미도 모두 사회성에 근거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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