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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5일 이후 보름 동안에 열 편의 시(또는 시 형식의 글)를 썼습니다. 믿기 어려우실 테지만 하룻동안에, 그것도 두세 시간 안에 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시상'에 의한 것이었지요.
경위를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가 동료 교사(1학년 담임)들과 함께 금강산을 간다고 해서, 그리고 반드시 달러가 필요하다고 해서 몇 백 달러를 맡겨놓고 있는 홍성의 외환은행 지점에 가게 되었지요. 북한 금강산 관광에 반드시 달러가 필요하다는 데서 오는 곤혹감과 비애, 교원공제조합의 도움으로 간다는데 교사들의 배우자들에게도 혜택을 줄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 이런 상호모순적인 마음을 안은 채….
그런데 내 통장에서 100달러를 찾는 과정에서 수수료 문제로 창구 여직원과 약간의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니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해지더군요. 술 생각이 났습니다.
그 동안 나는 술을 극도로 절제하며 살아왔습니다. 가족 외식을 하는 즐거운 자리에서도 소주를 딱 한 잔만 받아놓고 병아리 눈물 만큼씩 혀 끝을 적시는 식으로 마시곤 해왔지요.
'술 한잔 마시니'라는 시에도 표현이 되었습니다만, 통풍과 당뇨라는 병을 갖고 있는 탓이었습니다. 매일같이 한 알씩 먹는 약으로 아직은 혈당 조절이 잘 되는 편입니다만, 통풍에다가 당뇨가 겹친 경우에는 자칫 콩팥이 손상되기 쉽다는 의사의 경고성 조언 때문에 상당히 겁을 먹고 있는 상황이지요.
죽는 건 겁나지 않지만 결혼을 너무 늦게 한 탓에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아이들을 생각하면 조금은 오래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병석에서 오래 고생하다가 죽는 것도 겁나는 일이고…. 그래서 이미 망친 건강이나마 꽤나 신경을 쓰며 살고 있지요.
그런데 그 날은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막걸리를 딱 두 잔만 벌컥벌컥 마시면 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차를 주차장에 그냥 놓아둔 채 (주차료를 좀 더 물 것을 각오하고) 시장 안으로 들어가서 막걸리도 파는 술집을 찾았지요.
작정대로 막걸리를 두 대접 마시고 나니 단박 신선이 된 기분이더군요. 얼큰한 기분으로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는데 시상이랄까, 시 형식의 글로 쓰기에 알맞을 듯한 글감들이 속속 떠오르지 뭡니까.
이윽고 술기운이 거의 잦아들었을 쯤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오른 다음 메모지에다가 그 글감들의 제목을 대충 잡아서 기록을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천수만 제방 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자꾸만 새로운 글감들이 떠오르지 뭡니까. 조금 가다가 차를 멈추고 글감의 제목을 잡아 메모를 하고, 또 조금 가다가 다시 차를 멈추고 메모를 하고…. 그런 식으로 글감의 제목들을 메모하다보니 도합 열두 개의 시제들이 기록되더군요.
그런데 다음날 찬찬히 생각을 기울여보니 두 개의 글감은 다른 글감과 중복이 되는 것이거나 하나로 합칠 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열 개의 제목을 정한 다음 제목의 첫 글자를 가나다 순으로 배열해 놓고, '달러를 찾으며'①부터 시작해서 '팔순 노모의 기도'까지 차례로 작업을 했지요. 그렇게 해서 8월 15일 이후 보름 동안에 열 편의 운문을 얻은 거지요.
맨 마지막으로 소개한 '상조회를 하며'는 지난해 2월에 지은 것인데, 어디에도 활자화되지 않았고 내 홈피에도 올라 있지 않은 것이어서 소개를 했고….
이번의 경우보다 더 재미있는 시작 관련 에피소드가 있지요.
1995년 가을 어느 날 오후, 향리의 명산 백화산을 올랐지요.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아이들을 데리고….
손을 쳐들면 쪽물이 들 듯한 쪽빛 하늘, 10월의 꼬리를 아쉬워하며 막걸리 한 병을 마셨지요. 그러고 나니 정말 한없이 슬프게 행복해지면서 시 형식의 글로 쓰기 알맞은 글감들이 내 머릿속으로 줄줄이 쏟아져 들어오더군요.
그런데 내 손에는 볼펜도 메모지도 없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환장할 것만 같더군요. 그때 하나의 아이디어가 영감처럼 떠올랐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를 불러 옆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딸아이에게 글감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들려 주고, 제목도 대충 정해서 들려 주었습니다. 아이는 재미있는 표정으로 아빠의 얘기를 하나하나 귀담아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날 밤 나는 술자리에 참석했던 일도 있고 해서 낮에 얻었던 시상들을 깡그리 잊은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지요.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어제 백화산에서의 일이 환히 떠오르더군요. 서둘러 메모지를 펴놓고 다시 딸아이들 불러 앉혀놓고 어제 내게서 들은 얘기들을 구술토록 했지요. 아이는 완전히 녹음기였습니다. 글감의 제목과 내용들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내게 들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때도 다섯 편의 시를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살다보니, 아이들을 낳아서 기르다보니 참 재미있는 일도 생긴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내 딸아이가 벌써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답니다. 세월이 겅중겅중 흘러서 그때 사십대 후반이었던 나는 어언 오십대 중반이 되었고….
지난해 2월 '상조회를 하며'를 지은 이후로는 여름에 목적시(축복시) 한 편을 지은 것을 제외하고는 일년하고도 반년이 지나도록 단 한 편의 시도 짓지 못하였습니다. 의욕도 없었고,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감수성이 퇴화되어 가는 듯 좀처럼 시상이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지요.
그러다가 이번에 하루 한 나절 사이 줄줄이 떠오른 시상들에 의해 열 편의 시를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부끄럽긴 하지만 그게 다 술 덕분일 것 같습니다. 내가 이제는 마음껏 마시지 못하는 술, 막걸리 두 잔 덕분에….
다시금 내 머리 속에는 시상이 고갈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시상도 없고, 꼭 시를 쓰고 싶은 욕구도 없고, 앞으로는 또 좀체로 시상이 떠오르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 소박한 시들을 다시 보여 드리는 일은 기약없이 미루어질 수밖에 없을 듯싶습니다.
또 모르지요. 며칠 후에 아버님 묘소 벌초를 하고 나서 아버님께 막걸리 한잔 따라 올리고 나도 한잔 마시면 그 슬프게 행복한 취흥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시상들이 줄줄이 떠오르게 될지…. 취흥이 곧 시흥인 복된 현상으로 말미암아 또 여러 편의 시를 얻게 될지….
그렇게 되면 다시 여러분께 내 시들을 보여 드릴 수 있겠지요. 어느 독자님의 말처럼 너무 쉬워서 어려운 건지도 모를 내 소박한 시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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