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6분. 인류의 역사는 큰 전환점을 돌았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 열렸으며, 역시 지금까지는 경험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종류의 공포-죽음-고통들이 그 문을 통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1945년을 원년으로 해서 인류의 역사가 다시 씌어져야만 한다고 외쳐댔고, 과연 과학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기나긴 빙하시대를 거쳐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키기 시작한 이래 잊고 있었던, 종(種) 차원에서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포는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본의 두 도시(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은 인류 문명 전반에 걸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애초에 원자폭탄이 의도했던 것-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통해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겠다는-과는 다른, 또는 그 의도를 넘어서는 파급효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것들은 전후(戰後) 현대 문명의 특성을 규정지었다.
반핵(反核)운동은 단순히 파괴적인 무기의 제조와 사용을 반대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간이성-과학맹신주의-문명 제반 과 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성 전체에 대한 진지하고 비판적인 성찰을 촉구하는 문명비판적 운동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원폭 문제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결과적이고 표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왔던 것이 사실이다.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서방측의 불가피론과,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피해에 대한 일본측의 도덕론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며 원폭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왔다. 사실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전쟁을 빨리 끝내 더 이상의 인명 피해(물론 이는 전적으로 연합군 측의 '인명'만을 고려한 표현이다)를 막아야만 했다는 주장은, '그렇다면 과연 원폭에 의해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린 약 20만명(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사망자를 합쳐)의 일본 민간인들의 목숨은 소중하지 않다는 말인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또한 일본측의, '어찌 됐든 원폭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철저히 짓밟는 만행이며, 인류 문명 전체에 있어서도 하나의 악(惡)이다'는 주장은 당시의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볼 때, 전범국인 그들이 과연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으며 그들이 전쟁기간 동안 저지른 만행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원폭에 대한 논의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원폭은 그저 '파괴력이 막강했던 하나의 전쟁무기'나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꼭 필요했던 연합군 측의 조커(Joker)'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와 문명, 그리고 이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자연 그 자체의 존재를 위협하는 '거대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민족-국가 와 같은 표면적인 관념범주들 이면에 있는 '인간성'의 차원에서 원폭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리처드 로즈(Richard Rhodes)의 <원자폭탄 만들기(The Making of The Atomic Bomb)>는 '인간성'의 차원에서 원폭 문제에 접근을 시도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원폭투하'라는 결과적인 현상에만 집착하던 기존의 논의와는 달리, 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학적 탐구의 역사, 당시의 시대적 흐름, 정치적-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과학자들이 느꼈던 갈등, '민족-국가'와 '인간성'의 범주 사이에서 고민하는 과학자들, 순수 학문으로서의 과학과 이를 지배하려는 정치적-군사적 권력 집단의 문제, 원폭투하가 있고 난 뒤 원폭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통해 살펴본 '과학적' 가치판단의 문제 등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민족이나 국가, 또는 이데올로기 같은 이해관계를 모두 접은 채, 오로지 '인간존재'의 관점에서 원폭 전후의 역사를 분석한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던 일본 군인도, 점령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민간인들(그들의 국적이 어디든)도, 나찌 친위대도, 연합국 해병대도 모두 '인간'들이었을 뿐이다. 그들을 서로 '다르게' 만들고 서로 죽이도록 한 것은 민족-국가-이데올로기라는 조작된 환상들이었다.
특히,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학자들은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했던가에 대한 이 책의 서술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과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과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과학이 인간을 지배하는가. 과학은 그 자체로서 순수한가. 과학은 정치-이데올로기와 구별되는가. 또는 그것들에 저항할 수 있는가. 과학자란 누구인가. 그들은 정치적-역사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들은 그들의 연구 결과에 대해 도덕적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진정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리처드 로즈는 '영웅'이나 '특별한 엘리트 집단'과 같은 수식어를 통해 과학자들을 '인간존재'로부터 배제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히 '인간'일 뿐이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평범한 '인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평범한 인간 이상의 것들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원자폭탄은 그들이 이루어낸 '비범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평범한 인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원폭문제의 본질적인 요소임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원폭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역사적 상황을 만든 것도 인간이요, 폭탄을 직접 만든 것도 인간이요, 그것을 사용해 다른 인간들을 죽인 것도 바로 인간인데, 정작 원폭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는 민족-이데올로기-국가 들이 주체가 되어버린다. '인간'이 배제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한 쪽에서는 아군의 목숨과 적군의 목숨(그들은 모두 인간이다!)을 저울질 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자신들이 죽인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은채 원폭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의 목숨(역시 그들 모두 인간이다!)에만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시각이 서방측의 입장(그는 미국인이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특히, 그가 전쟁 당시에 원폭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으로 의심받아온 독일 과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분히 '연합국적'이다(독일 과학자들이 전쟁기간 동안 나찌의 원폭개발 프로젝트에 '동원'되었는지, 아니면 '참여'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서방측에서는 그들이 '참여'했다고 의심했지만, 독일 과학계의 거두였던 하이젠베르크는 종전후 <부분과 전체>라는 에세이집을 통해 자신들이 '동원'되었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충분히 '저항'하였음을 밝혀 독일 과학자들을 변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인간성에 기반한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 전개가 빛을 잃는 것도 아니다. 독일 과학자들에 대한 그의 의심 역시도 원폭에 대한 인간성 차원에서의 '의심'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사회에서는 일본의 피폭문제에 대해 냉담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당사자가 아닌 만큼 남의 일이라 여기기도 했고, 민족적 감정이 더해져 '일본놈들은 원폭 맞아도 싸다'는 관념까지 존재해왔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산화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 중에 조선인(그들 대부분은 일본의 강제에 의해 원치도 않는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다)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 우리사회에도 엄청나게 많은 수의 피폭 2세대들이 원인조차 알 수 없는 질환과 사회의 무관심에 의해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그런 생각들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민족적 이해관계를 떠나, 인간의 생명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믿고 이를 실현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진보의 조건이라고 믿고 있다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그들 대부분은 직접적인 '전투병력'이 아니었다) 한순간에 스러져간 상황에 대해 그런 생각들을 할 수 있을까.
사람의 생명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 법이다. 그리고 죽어간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영혼을 보상받는 길은 또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복수'는 결코 사라져간 생명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진정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하는 길은 다시는 그들과 같은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폭에 대한 논의는 가장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원폭에 대한 서방측과 일본측의 주장이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은 '테러와 대(對)테러 전쟁'이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사람의 생명'은 모든 정치체제-이데올로기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을 위해서라도 원폭에 대한 보다 건설적이고 본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원폭문제는 냉전시대에 국한되는 것이라고 믿는 순진함은 지양하자. 아직도 셀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핵무기들이 각 국가의 병기창에 보관되어 있다. 1945년 처음 그 문이 열린 '죽은 자의 세계'는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원자폭탄 만들기>라는 한 권의 책은 너무나도 소중한 유산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