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잉사의 'F-X 절충교역 약속 불이행 파문'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불가피하게 된 한국항공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 대형사업의 절충교역에 절대 의존하고 있는 한국항공의 현 상황에서 이번 F-X사업의 절충교역은 보잉사로부터 민수물량을 대규모로 수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데다가, 카쇼기씨의 투자 역시 외자도입을 통해 재무구조 개선하고 경영 정상화를 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마이뉴스>가 최근 카쇼기씨가 한국항공의 길형보 사장에게 보낸 서신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드러났다. '수신일 2002년 7월 30일, 수신자 길형보 장군'이라고 적힌 서신에는 "나는 한국항공에 상당한 규모의 외화를 투자하고 동시에 아주 유리한 판매 창구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를 모함하고 모략했다"면서 "내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법적인 대응을 포함한 적절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적혀있다. 서신은 이어 "저는 아주 유감스럽게도 제가 제안한 투자문제에 대해 추가 협의를 미룰 수밖에 없다"고 못박고 있다.
또 이 서신에는 한국 일부 언론의 보도내용을 빌어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부분을 적시하면서 자신의 한국 투자를 주선한 한국항공 장명광 전무의 무고를 주장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한국항공, 통합이후 적자 더욱 가속화
한국항공의 외자유치 실패가 가져오는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는 한국항공우주산업의 출범과 현주소를 살펴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80년대 초 재벌들은 항공산업을 황금 알을 낳는 '미래산업'이라고 부르며 경쟁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국내항공산업은 제한된 국내수요시장과 산업기술력 절대부족이라는 여건 하에서 대우, 삼성, 현대, 대한항공 등 대기업들이 나눠먹기 식으로 참여하면서 과당경쟁, 중복투자 문제를 양산해 내며 적자행진을 이어가게 됐다.
결국 80년대 말부터 국내 항공사의 통합문제가 논의되었고 IMF를 거치면서 99년 10월 정부가 주도해 외자도입을 통한 경영 정상화를 전제로 대우, 삼성, 현대 등 항공3사 통합 단일법인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한국항공)을 출범하게 된다.
정부는 2000년 2월 한국항공에 대해 고정익 및 회전익 항공기 분야 전문화 업체로 지정해 주고, 과당경쟁 중복투자를 막고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주는 등 독점적 특혜(?)를 준다. 그러나 한국항공은 현재 단일법인으로 출범한 지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통합이전과 다를 바 없는 3사 별도 체제로 운영되면서 적자행진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우선 합병을 하게되면 당연히 따르는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 여전히 정부의 낙하산 인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회사를 역동적으로 이끌어갈 지도자가 없다보니 회사 운영이 '한지붕 세 가족'처럼 따로 놀면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출범 때부터 채권단의 출자전환 조건이었던 외자유치가 조금도 진척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구조조정 실패의 한 예로 사천 1, 2공장의 경우 1km 거리에 인접해 있고 두 공장이 유사한 최종조립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사천 제 2공장은 통합전과 같이 창원공장 소속으로 운영되며 중복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서울 본사에서는 공장별 특성과 능력에 따라 물량 배분·조정 및 능력·자원의 통합운영을 해주어야 하지만 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항공이 통합취지도 살리지 못하고 근본적인 문제도 개선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한국항공의 한 관계자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는 망하는 일만 남았다"고 푸념한다.
"낙하산 인사로 보임되는 KAI 사장들은 냄비속 개구리처럼 현실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2년마다 바뀌는 KAI 사장들은 주주사들의 눈치만 보는데다가, 전문성 없는 사장들은 회사에서 수행하는 각 사업별 특성을 꿰뚫는 안목이 요구되는 사업간의 구조조정을 해낼 능력이 없다보니 현장감이 없는 본사 임원들의 조언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증자 및 출자 전환해도 부채비율 326%
한국항공은 99년 3사가 964억원씩 출자(현물출자 포함)해 자본금 2892억원으로 출범한 단일 법인이다. 그러나 2000년에만 1113억의 당기 순손실을 냈고, 지난해에도 600억원의 손실을 냈다.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항공은 주주사들의 증자와 채권단의 지원으로 겨우 굴러가고 있다고 말한다. 적자가 누적되자 주주회사들은 지난해 334억원씩 총 1002억원을 증자해 주었고, 채권단도 외자유치 등 자구노력을 조건으로 728억원의 부채를 출자전환 해주기도 했다. 또 3688억원에 이르는 채무도 5년 거치 4년 분할로 상환조건을 완화해줬다.
그럼에도 자본은 지난해 말 1704억원이 잠식됐고, 부채규모도 통합당시 5506억원이었던 것이 2001년 말 실질 차입금이 8221억원으로 늘어나 2년간 2715억원의 실질적인 부채증가를 가져왔다.
또한 통합당시 246%였던 부채비율은 2001년 주주회사의 증자 및 채권단의 출자전환 이후에도 326%까지 상승했다.
한국항공의 한 고위 관계자는 "올해는 그나마 대금이 들어올 작업들이 절정에 이르기 때문에 사정이 좀 나은 것 뿐"일 뿐이라면서 "1조원에 가까운 부채를 줄여 이자부담을 완화하지 않는 한 내년에는 현금흐름이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항공이 지난해 영업을 통해 벌어들인 이익은 모두 468억원이었으나 이자비용은 그보다 많은 539억원이나 됐다.
"'불법 낙하산'의 표본 길형보 사장"
한국항공 부실 최고 요인의 하나로 거론되는 낙하산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항공 사장자리가 항공산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영진이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초대 사장인 임인택씨는 상공부 차관, 교통부 장관을 지낸 인물로 "연내에 외자 2천억을 도입하고 부채 1500억원을 출자전환 받아 부채비율을 100% 이하로 떨어뜨리겠다"고 공언했지만 결국 하나도 지키지 못한 채 지난해 10월 개각 때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영전돼 자리를 떠났다.
또 후임 길형보 사장은 2001년 10월 12일 육군참모총장에서 퇴임 후 불과 10일 후인 10월 22일 한국항공 사장으로 임명돼 '불법 낙하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공직자윤리법이 퇴임 공직자의 영리사기업체 취업을 엄격히 제한하는 규정을 두고 있는 때문이다.
이를 두고 참여연대는 지난 8월 19일 "퇴임후 일정기간 전직과 관련된 기업체에 취업을 제한토록 한 공직자윤리법을 위반한 혐의가 있다"면서 길형보 항공우주산업 사장을 서울지검에 고발하기도 했다.
길형보 사장의 '불법 낙하산'을 두고 지금도 한국항공 내부에서는 말들이 많다. 한 내부 관계자는 "전문성이 전혀 없는 길 사장은 취임 2개월만에 현장의 현실과 업무 효율을 일체 무시한 인사를 단행해 논란이 인적이 있다"면서 "이는 군 경험이 없는 민간인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 후 전방의 지휘체계, 군의 배치를 2달만에 흔드는 것과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카쇼기 투자, 과연 적절한 걸까?
정부는 99년 국내 항공3사를 통합시키면서 통합법인이 방산 업체임을 감안해 50% 이내의 외자유치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회사 출범의 전제조건인 외자유치는 한국항공 출범 후로부터 간헐적으로 시도되었으나, 투자자의 무리한 요구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 | | 사우디 출신의 세계적 무기중개상 | | | 카쇼기는 누구인가 | | | | 아드난 카쇼기(67)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중동 무기중개상으로 큰돈을 벌어 현재 세계적인 부와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카쇼기의 이름은 린다 김을 키운 무기상의 대부로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카쇼기는 26세 때 미 군수업체인 록히드마틴의 대리인으로 무기중개에 첫발을 들여놓은 뒤 승승장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국제사회에 알려진 것은 86년 터진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계기였다.
당시 그는 미 백악관을 설득, 이란에 무기를 수출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나 세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97년에는 태국에서 반도체회사 등을 구입한 뒤 토지를 시가보다 높게 책정, 은행에서 거액을 대출 받으려 한 혐의(사기)로 기소되기도 한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다.
현재 카쇼기는 충남 안면도 개발에 참여해 앞으로 10년간 10억불 이상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한국의 중동진출을 지원했으며, 특히 아프리카 등 제3세계국가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우위적 외교관계 수립하는 것을 지원함으로써 한국정부로부터 수교훈장을 받기도 했다. / 공희정 기자 | | | | |
그러나 카쇼기씨가 제안한 2억불 현금 투자는 환불성 조건이 없는 순수투자로서 한국항공의 고질적인 재무상태를 해결하고 카쇼기씨의 해외조직망을 통하여 적극적인 해외수출도 제안에 포함되어 있어 전문가들은 이를 높이 평가했다.
이에 대해 장명광 한국항공 전 전무는 "이같은 카쇼기씨의 제안은 투자는 하되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아 한국항공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면서 "과거 한국항공이 받은 어떤 투자조건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월등히 좋은 조건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 한국항공이 단일법인으로 출범 뒤 보잉-BAE시스템스와 협상을 벌일 때, 보잉-BAE 쪽은 3700만달러에 37%의 지분을 넘길 것을 요구했고, 보잉쪽 이사회 멤버가 이사회 의사결정에서 비토권을 갖도록 요구했다. 게다가 한국항공이 수행하는 정부 사업에 대한 결정권도 요구했다.
장 전무는 이어 "카쇼기씨의 2억불 투자가 현실화되었을 경우, 이 투자를 통한 부채의 조기상환과 이에 따른 부채탕감, 그리고 기존 주주사의 기존 누적적자의 감자를 통해 한국항공은 부채규모를 100%미만의 건전한 재무구조를 갖게 됐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카쇼기씨의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한국항공은 단일 최대주주 부상에 따른 경영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고 적극적인 구조조정 및 사업과 사업장 합리화 등을 통해 세계수준의 항공회사로 탈바꿈하게 됐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항공의 관계자는 "아직까지 카쇼기씨의 투자 자체에 대한 논의도 한적이 없다"면서 언급을 회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