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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일 세종로 미대사관안으로 들어가 성조기를 불 태우려던 한 대학생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살인미군 처벌하고 여중생의 한을 풀자"등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13년 전 미 대사관저 점거 사건을 다룬 89년 10월13일자 <동아일보> 1면
ⓒ 동아일보

저는 지금부터 13년 전 1989년 10월 13일 '전대협 반미구국결사대'의 일원으로 그레그 미 대사 관저 점거농성을 했던 대학생 6명 중 한 사람입니다.

오늘(1일) 후배들은 그때 아마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 겁니다. 오늘 <한겨레> 사회면에 '반미의 횃불'을 낚싯대에 매달아 성조기를 불태우려 시도하는 후배들의 투쟁을 보았습니다.

문화관광부 청사 담을 넘어 대사관에 진입한 그 '수법'은 저희 결사대가 대사관저 담벼락에 차를 대고 차량 지붕을 딛고 담을 타넘어 들어갔으니 선배들의 담타기 전법을 계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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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후배들도 저에게 적용됐던 법률로 조사를 받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검찰이 '농수산물 수입개방 반대와 불평등한 한미 관계개선 및 노태우의 매국적 방미 반대'를 외쳤던 저에게 적용해 기소한 법률은 국가보안법 위반, 집회 및 시위에 대한 법률 위반, 화염병 처벌법 위반, 건조물 침입 및 방화 미수, 폭력 및 특수공무집행 방해 및 치상, 총포 도검 및 화약법 위반이고 운전면허 없이 차를 몰았던 한 동지는 무면허에 도로교통법 위반까지 적용되었습니다. 담타기 수법도, 외쳤던 구호도, 적용될 법률도 13년 전과 대체로 닮은꼴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각이 대체로 후배들의 투쟁이 있은 지 24시간이 지났으니 후배들이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지도 대략 상상이 갑니다. 기사에 의하면 "당시 현장 곳곳에서 '카메라 뺏어', '못찍게 해'하는 등의 다급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하는데 저희 때도 똑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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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진압 과정에서 머리를 방패에 찍혀 열 바늘을 꿰매야 했던 것처럼 후배들 10명 중 몇 명은 진압과정 중 다쳤을 것이고 연행이 되고 나서는 경찰의 신분확인 작업이 진행됐을 겁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이면 공부나 할 것이지 부모 잘 만나 세상물정 모르고 날뛴다'느니 '너희가 이런다고 바뀌지 않는다' 등의 인격 모독을 당하기도 하고 몇 대 구타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유치장에 수감됐을 것이고 지루한 알리바이 경찰조사를 마치고 검찰로 이송될 것이고 구치소에 수감되겠지요. 제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동거했던 사람들이 전두환 처남 이창석씨 장세동씨 뭐 이런 류였습니다. 후배들이 가게 될 그곳도 아마 무슨 무슨 게이트 관계자들로 득실거릴 겁니다. 감옥 밖에서는 함께 할 수 없었던 흑과 백의 동거가 시작되는 셈입니다.

▲ 한 대학생이 불 붙은 솜뭉치가 매달린 낚싯대를 이용해서 미대사관 2층에 내걸린 성조기에 불을 붙이려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저는 이날 올림픽 성화 점화식 같은 모습의 '반미횃불' 투쟁을 보면서 13년 전의 오늘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건국대를 출발해 비장한 각오로 죽음을 무릅쓰고(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개 낀 군자교를 넘으며 두려움을 달래고자 불렀던 '애국의 길'이란 노래를 떠올리며 읊조렸습니다. 콩닥거리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은박지로 감싼 쇠파이프에 전해지던 그 싸늘한 긴장감. 그 긴장감은 남대문 경찰서에 유치되고서야 사라졌습니다.

후배님들! 앞서 말했듯이 13년 전에 외쳤던 구호나 적용 법률과 절차는 지금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만큼 이 땅 한반도는 미국의 지배 내지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그 불이익과 피해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번 미선이와 효순이의 참극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자 비극입니다. 미국과 한국 정부의 관계는 1950년 7월 대전협정 이후 크게 변한 게 없고 한미행정협정개정 또한 지지부진합니다. 주한미군 기지로 무상 임대해준 것이 인천광역시 넓이의 1.5배나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치고 들어갔던 그 미국 '총독부(?)'의 오만불손함은 여전히 그 기세가 등등합니다.

전대협 시절이나 한총련 시절에도 한미간 종속의 문제는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13년 전과 오늘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 있습니다. 동계 올림픽 때 오노의 반칙과 금메달 강탈사건으로 우리 젊은 층에서 일기 시작한 엄청난 반미 열풍과 'Fucking U.S.A' 작곡가 윤민석씨에게 답지하고 있는 성금을 보면 그 동안 보이지 않게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미선이 효선이 하늘나라 우체국에 부쳐진 3만여 통의 편지에서도 이제 반미의 금기가 아래로부터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 미대관저 점거투쟁이 헛되지 않았듯이 여러분들의 오늘의 이 거사는 분명 외로운 투쟁은 아닙니다. 유리창을 몇 장 깼다고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을 박살냈다고는 이제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후배님들, 또 다른 미선이와 효순이의 불행은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그래야 후배들이 서른 여덟쯤 먹었을 때 오늘 초등학교 2학년생들이 또 다시 고생하며 반미운동을 하지 않겠지요. 안에서 고생이 많을텐데 의연하십시오.

덧붙이는 글 | 반미투쟁 13년선배가 한총련 후배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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