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왕양이 지니고 있는 한국영화 DVD 타이틀. 중국 내에서 한국영화 매니아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왕양이 지니고 있는 한국영화 DVD 타이틀. 중국 내에서 한국영화 매니아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 모종혁
올해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충칭의 한 증권회사에 다니는 왕양(王洋 여 21세)는 전형적인 하한주(哈韓族)이다. 그녀는 삼성전자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고 광동에서 생산된 가짜 한국브랜드 청바지를 즐겨 입으며, 드봉 화장품으로 화장을 하고 한국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하이힐을 신고 다닌다.

이런 왕씨의 취미는 한국영화 DVD 타이틀 감상. 2년 전부터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았던 왕씨는 작년에 접한 영화 '쉬리'와 '엽기적인 그녀'를 보고 한국영화 마니아가 됐다. 다른 중국 도시 중산층 가정과 같이 왕씨의 가족 또한 작년말 DVD기기 값이 대폭 떨어지면서, 일본 파이오니아 플레이어와 중국 브랜드 미니 홈시어터를 구입했다.

지난 몇 년새 중국 영상기기의 대명사였던 VCD와 DVD 플레이어의 가격차가 거의 없어진데다, 중국에서 유행중인 '지아팅잉유엔'(家庭影院, 홈시어터)를 갖추려는 왕씨 가족의 욕구가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DVD는 보통 VCD보다 화면이 훨씬 더 선명할 뿐만 아니라 소리에 있어서 영화관에 앉아 있는 듯한 음향 효과를 느낄 수 있다"는 왕씨는 "각 DVD 타이틀은 '화쉬'(花絮, Special Feature)를 포함하고 있는데, 감상하는 영화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좋다"고 지적했다.

한국영화 '파샤오요'(發曉友, 마니아)인 왕씨가 DVD 타이틀을 사기 위해 들이는 정성은 대단했다. 왕씨는 필자에게 "한 달에 3,4차례에 걸쳐 충칭시 전역의 널려져 있는 영상소프트점을 둘러본다"면서 "보고 싶었던 영화나 새로 나온 타이틀을 구입해서 보면 기분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한국영화는 중국에서 발매된 모든 DVD 타이틀을 총집합시킨 놓은 듯했다.

적지 않은 DVD 타이틀을 수집한 필자도 처음 보는 영화 '씨받이'를 비롯하여, '섬', '꽃섬', '파이란'와 같은 실험성이 높은 작품까지 지니고 소장하고 있었다. 왕씨는 언제가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꿈을 이루고자 교재와 회화 테이프를 사서 혼자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기도 했다.

각기 다른 한리우 3대축의 발전 경로

한 영상소프트점 판매부스에 따로 전시·판매되는 한국영화 VCD 타이틀. 최근 한국영화는 중국 젊은이들에게 인기 '짱'이다.
한 영상소프트점 판매부스에 따로 전시·판매되는 한국영화 VCD 타이틀. 최근 한국영화는 중국 젊은이들에게 인기 '짱'이다. ⓒ 모종혁
한국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진 중국에서의 한리우(韓流)는 지난 3,4년 사이 열풍처럼 불어닥친 새로운 유행이다. 지난 1997년 이전까지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하나로,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쯤으로 여겨졌다.

산둥(山東)성과 보하이(渤海)만을 중심으로 겁없이 진출하는 한국 투자기업들과 연해·만주지역을 여행하면서 물 쓰듯 돈을 쓰는 한국인들을 통해 중국인의 뇌리에는 '한국, 한국인=돈 잘 쓰는 나라, 족속들'라는 인상이 강하게 박혔다. 그러던 와중 한국이 금융위기의 일격을 당하자, 중국에게 있어 한국은 배워야 할 '경제모델'에서 질시와 조소만이 남은 실패한 '반면교사'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중국 내에서 한국 이미지를 일거에 바꾸어 놓은 것이 바로 한리우였다. 즉 음악, 드라마, 패션, 영화 등 한국의 대중문화가 대만과 홍콩을 시발로 중국 대륙에 엄습하여 중국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이런 한리우의 3대 중심축인 음악, 드라마, 영화는 각기 다른 경로로 중국에서 정착되었다.

한리우의 첫 불씨를 지핀 한국가요 열풍의 주도자는 단연 우전소프트 김윤호(43) 사장이다. 1996년 3월, 베이징 FM방송국에 '서울음악실'(漢城音樂廳)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했던 김 사장은 한리우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김 사장은 1998년 중국 최초로 한국가요 음반인 H.O.T 앨범을 발매했고, 2000년 2월에는 베이징 노동자체육관에서 열린 H.O.T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쳐서, 중국 언론이 '합한왕'(哈韓王)이라는 칭호까지 선사했다.

현재는 국영 라디오 방송국인 중앙인민방송에 한국음악 전문 프로그램 '한국을 들어보세요(聆聽韓國)'를 주관하여 중국 전역에 방송하고 있다.

음악의 뒤를 이어 한리우를 확산시킨 것은 드라마이다. 1998년 CCTV를 통해 방영되었던 <사랑은 뭐길래>는 중국 드라마 시청률 2위를 기록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1999년부터는 대만에서 한국 드라마의 붐을 이루고, 중국에 적지않은 시청자를 확보한 홍콩 봉황위성TV가 시청률과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별은 내가슴에> <안녕 내사랑> <모델> <청춘의 덫> <도시남녀> 등 한국 연속극을 잇달아 선보였다. 여기에 2000년 <가을동화>가 중화문화권 전역에서 빅히트를 침으로써, 수출되는 한국 드라마는 80%가 중국에 팔리고 있다.

한리우의 추종자들은 지화셩위세대

가장 뒤늦게 중국에 소개된 한국영화는 최근 들어 한리우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 2000년 5월 베이징영화대학 한국유학생회가 주도하여 열린 한국영화제에서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미술관 옆 동물원> <8월의 크리스마스> <유령> 등 12편의 최신작이 상영되었다.

세계적인 감독 장이모(張藝謨)를 비롯해 중국 관객들은 "한국영화가 장족의 발전을 했으며 할리우드의 공세 속에서도 기세를 떨치는 이유를 알겠다"며 놀라워 했다. 이전에도 간혹 한두 편의 한국영화가 선보이긴 했지만, 작년이후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DVD 타이틀은 한국영화의 일대 붐을 일으키게 한다.

특히 <엽기적인 그녀>가 일으킨 열풍은 상상을 초월했다. <엽기적인 그녀>는 중국에서 몇 안 되는 정품으로 DVD 타이틀로, 올 한 해 동안 해적판을 포함해 400만장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그 동안 중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한국 연예인인 H.O.T 멤버, 안재욱, 김희선을 밀어내고 차태현과 전지현의 인기가 급부상하고 있다.

전지현의 경우 본래 성이 '왕'이고 화교라는 추측성 가십기사에서, <화이트 발렌타인> <시월애>와 같이 출연 영화들까지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하한주'라고 불리는 한국대중문화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지화셩위(計劃生育)세대이다. 지난 1978년 이후 중국 성시별로 단계적으로 시행된 인구억제정책인 지화셩위는 중국사회를 한가정 한자녀로 핵가족화시켰다.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부모 여섯 명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란 지화셩위세대는 이미 성년으로 자라나서 오늘날 중국 소비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고객층으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문화산업에 있어서 이들의 구매력은 절대적이다.

2000년 11월, 광둥(廣東)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신져우칸'(新週刊)은 "한리우 열풍의 발신지는 새로운 유행에 민감한 10,20대 젊은 세대"라며 "이들이 소설 음악 만화 영화 패션 등 모든 분야의 한국문화상품을 소비·확산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H.O.T의 열렬한 팬인 왕옌(王艶, 여, 20) 또한 "역사적으로 원한을 가지고 있는 일본문화에 비해 한국문화는 친근하고 아시아적이다"라며 "예쁘면서도 모던한 가수·배우들, 섬세하고 풍부한 스토리, 화려하고 자극적인 구조 등으로 잘 포장된 한리우를 누가 싫어하겠는가"라고 필자에게 되묻기도 했다.

오지에까지 한리우 전파시킨 해적판의 위력

중국의 하한주들은 단순히 한국문화를 좋아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적지 않은 중국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헤어스타일과 똑같이 하려고 한국식 미용실을 불이 나게 찾고, 다양한 염색 머리로 도시 광경을 바꾸고 있다.

여성들은 선망하는 배우의 의상과 액세서리를 사려고 한국상품점을 쉴새없이 방문한다. 이런 현상에 착안을 얻은 기업들 또한 강타, 안재욱, 김희선 등을 자사 제품의 광고 모델로 기용해서 큰 매출액 증가를 보이고 있다.

한리우가 중국 소비시장의 주역으로 등장한 지화셩위세대의 구매력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 가짜시장에서도 한리우 열풍이 거세다.

대표적인 예가 핸드폰시장의 최고 인기품인 삼성전자의 애니콜. 성능이 뛰어나고 외양이 예쁜 삼성 핸드폰은 모조품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서, 이를 모르고 구입한 소비자의 불만을 사고 있다. 역시 애니콜을 구매해서 쓰고 있는 왕옌씨는 자신이 쓰는 제품이 가짜인 줄 모른 채, "삼성 핸드폰은 밧데리가 하루면 먹통이 된다"며 불만을 토로해 필자를 씁쓸하게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을 괴롭혔던 한국제품 모조품은 문화상품에 있어서 더욱 극심하다. 불법 복제가 손쉬운 특성상 중국에서 팔리는 한국관련 문화상품은 95% 이상 가짜다.

일반 음악·영상소프트점에서 8위안에 팔리는 음악 CD, 60~120위안대로 다양한 종류의 편집본이 나도는 드라마 전집, D-5·D-9 각각 8·23위안으로 팔리는 DVD 영화 타이틀은 1회성 전파를 타는 방송과 달리 소비자가 직접 돈을 지불하기 때문에 상인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상인들은 거미줄 같은 유통망을 통해 가짜상품을 중국 곳곳에 유포시키는데, 신장(新疆)위구르족자치구 카슈가르와 같은 오지에까지 한국 대중문화가 흘러 들어갔다.

중국이동통신 캬슈가르지사에 근무하는 왕샹(王祥, 여, 24)씨는 필자와 전화통화에서 "여기 방송에서는 한국영화를 거의 불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 DVD 타이틀을 사서 이미 4,5편의 한국영화를 보았다"고 말했다. 이렇듯 불법 복제판은 중국에서 한국영화를 보급시킨 메신저일 뿐만 아니라 중국 DVD산업을 진흥시키는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다음 회에서는 중국 DVD산업의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해적판이 하드웨어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한겨레의 '하니리포터'에도 송고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