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1974년 12월14일) 오후5시쯤 경찰관이 찾아와서 '5시30분에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알려왔어요. 아내가 미리 알아서 가방을 준비했죠.
죽음을 앞둔 사형수 8명의 부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와서 금반지를 내 손에 끼워줬던 것 같아요. 지금도 누군지 모르지만, 그 아주머니는 '오 목사가 일본에 가서 친구도 돈도 없으니 반지라도 팔아서 엔화를 마련하라'는 뜻이었던 것 같아요. 그 반지를 아직도 끼고 있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인 15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www.kdemocracy.or.kr) 대회의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으로 방한, 이날 간담회장을 찾은 미국인 조지 오글(한국이름 오명걸 73) 목사는 오른팔을 치켜들어 손에 끼워진 반지를 청중에게 보여줬다. 그는 '반지 에피소드'를 또박또박한 한국말로 전해 감동의 깊이를 더했다.
'오 목사'와 동갑내기로 이듬해 역시 유신정권의 등에 떠밀려 국외로 추방됐던 진필세(미국명 제임스 시노트 73) 신부 역시 오글 목사의 얘기를 들으며 상념에 젖어들었다.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풀이되는 한국 이름처럼 시노트 신부는 75년 공산주의자로 몰려 목숨을 잃은 '사형수 8인'의 유족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인혁당 가족들과 고락을 같이 했던 벽안의 성직자들은 그때처럼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느덧 칠순이 넘은 '인혁당 사형수' 미망인들을 향한 음성은 나직이 떨리고 있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정부 전복 음모'라고 규정한 인혁당 사건은 지난달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당시 관련자들의 혐의가 고문으로 조작됐다"는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진술을 공개하며 28년만에 재조명됐다.
당시 유신독재의 음모에 맞서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폭로했다가 추방당한 두 사람은 올해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한길에 올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입을 모았다.
"진실을 좇아 용감하게 싸운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의 투쟁이 나를 자극해서 동참하게 했습니다.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졌던 1975년 4월9일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습니다.
의문사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이만큼이나마 밝혔지만 밝힐 게 아직도 많습니다. 앞으로는 억울하게 숨져간 이들과 가족을 모두가 기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시노트 신부)
미국 메리놀 신학교를 졸업한 시노트 신부는 1960년 한국에 파견된 후 인천 답동성당을 거쳐 영종도에서 주민들을 위한 의료활동을 벌였다. 어렸을 때 읽은 A.J.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의 주인공 치셤 신부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화돼 사제의 길을 택하게 됐다고.
그는 74년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인혁당 관련 구속자들이 극심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인혁당 관련자 구명운동'에 나섰다.
시노트 신부는 오마이뉴스 기자에게 "74년 인혁당 사건 발표 전에 중정 직원이 내게 '조금 있으면 큰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독재자 박정희가 정권 연장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칠 것이라는 직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75년 4월8일 대법원의 사형확정 판결부터 이튿날 서대문구치소 사형장(현 서대문독립공원)에서의 형 집행, 사체 인도(10일)를 둘러싼 유족과 경찰의 몸싸움이 이어지는 역사의 현장에서 유신의 군화발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시노트 신부는 특히 우홍선(당시 45세,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씨의 시신에 남은 고문 흔적을 직접 보고 구명운동에 나선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거듭되는 시위 참가로 유신정권에 '반한인사'로 낙인찍힌 시노트 신부는 결국 그해 4월31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인혁당 가족들과 고락을 함께 한 1년간의 경험이 독재정권에 신음하는 제3세계 민중들의 인권문제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미국 듀크신학대학을 졸업하고 54년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오글 목사 역시 60년부터 인천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었다. 고향을 떠나 이국의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힘써온 그에게 74년 10월 어느 날 밤늦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운명을 바꿔놓는다.
"어느 아주머니가 '목사님과 얘기해야겠는데, 전화로는 안되겠습니다"고 하더군요. 다음날 8명의 아주머니들(인혁당 사건 사형수 부인들)이 내가 주관하던 목요기도회에 갑자기 찾아와서 '우리 남편이 억울하게 죽게 생겼으니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난감해진 나는 '내가 뭘할 수 있겠냐'고 고개를 저었지만 시련에 처한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글 목사는 이들과 교류하고 기도회에서 인혁당 사건을 거론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인혁당 사람들은 빨갱이다. 빨갱이는 죽여야겠다. 당신도 공산주의자임을 고백하라'고 윽박지르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조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서명을 거부하자 나를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간담회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인혁당 사건 유족 및 민주인사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간담회에 참석한 인혁당 구명운동 관련자들은 유신독재에 짓눌려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언론을 질타하기도 했다. 당시 관련자들을 변호했던 이돈명 변호사는 "뼈에 사무치는 기억으로 남는 당시 상황이 신문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고 섭섭한 감정을 내비쳤다.
간담회 초반에 던져진 문정현 신부의 질타는 좀더 직설적이다. 그리고 그의 말은 재심 청구를 앞둔 인혁당 사건의 재조명을 위해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이 자리에 기자들이 많은데 한 말씀 드리죠. 인혁당 가족들은 언론에 대해 기피증이 있습니다. 아니, 증오심도 있다고 할 수 있죠. 74, 75년에 언론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억울한 사정 들어달라고 언론사에 찾아다닐 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유족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한다고 하는데, 사과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 | 인혁당 사건, 재심으로 가는 길 '첩첩산중' | | | 75년 대법원 판사 '원로 8명' 생존... 여전한 영향력 행사 | | | | 의문사위원회의 진상규명 활동으로 사건의 성격 규정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지만, 그러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명예회복은 '법원의 재심'이라는 큰 시험대를 앞두고 있다.
인혁당 사건의 최종판결에는 민복기 대법원장을 비롯해 김영세, 김윤행, 민문기, 안병수, 양병호, 이병호, 이영섭, 이일규, 임항준, 주재황, 한환진, 홍순엽 등 13명의 대법원 판사가 참여했지만, 이들중 8명은 생존해 '법조계의 원로'로서 여전히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중 이일규 판사만이 "2심 재판 절차에 위법이 있으므로 원심파기를 면할 수 없다"고 소수의견을 냈다.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공동대표 문정현 박형규 이돈명)는 일단 인혁당 사건이 고문조작으로 드러난 만큼 법원에 재심 청구와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형태 변호사는 "의문사위원회 발표를 통해 ▲ 고문에 직접 가담했거나 이를 목격한 당시 수사관들과 교도관들의 증언 ▲ 인혁당 조직결성의 증거가 될만한 물증이 없다는 수사관들의 증언 ▲ 조서가 조작됐다는 수사관들의 증언 ▲ 피고인들이 무죄를 주장하며 증거신청을 했지만, 법원이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변호인들의 증언 등 당시 소송절차에서 제출될 수 없었던 증거들이 새로 드러났으니 법원이 재심청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책위는 조만간 인혁당 사건 당시 변호를 맡았던 이돈명, 한승헌 변호사 등을 망라한 재심청구 변호인단을 구성, 법정 투쟁을 위한 구체적인 일정을 잡을 방침이다. / 손병관 기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