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21대 왕이었던 개로왕(원래 이름 여경)은 꿈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된다. 황음(荒淫ㆍ음탕한 짓을 함부로 함)에 빠져 있던 여경은 꿈속의 여인을 현실에서 찾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도미의 아내, 아랑을 찾아낸다. 인간의 욕망으로 대변되는, 여경의 황음은 결국 도미의 눈을 멀게 하고 여경 스스로 자신의 미모를 저주하게 만든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보았던 도원경의 선경을 바탕으로 안견이 그린 그림이다. 최 작가는 이 설화를 바탕으로 인간의 욕망이란 어젯밤 꿈처럼 허무한 것이라고 관조적으로 말한다.
책을 덮는 순간, 어차피 '도미와 아랑의 사랑'은 현실 속에서 사라진다. 사랑의 가치는 변화되어 자기를 희생하는 일은 거룩하게 여겨지기 보다 미련하게 보이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랑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일 것이다.
'감정' 있는 그림들
1995년에 처음 발표된 <몽유도원도>는 출판사 열림원을 통해 새롭게 출간되었다. 이 책엔 최인호의 자연스러운 문장과 이야기 전개 외에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화가 박항률이 그린 그림은 마치 꿈속의 영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그의 그림엔 '감정'이 있다. 한없이 슬퍼 보이는 인물들의 무표정과 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듯 느껴지는 그림의 풍경은 신비스럽다. 한(限)이 넘쳐 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귀기(鬼氣)마저 서려 있는 듯하다.
그림은 독자들이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치 벽화로 남은 사랑처럼 독자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도미와 아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과 영화로도 제작 중
<패왕별희> <현 위의 인생>으로 유명한 첸 카이거 감독과 <명성왕후>의 연출가 윤호진은 모두 <몽유도원도>에 매료되었다. 현재 한ㆍ중ㆍ일 합작으로 아시아 영화인이 연대하여 영화 <몽유도원도>가 제작 중이다. <마지막 황제>의 영화음악을 맡은 사카모토 류이치, <클리프행어>의 촬영감독 존 부르노가 가세, 다국적 영화가 될 전망이다.
또한 오리엔탈리즘을 내세워 브로드웨이를 겨냥한 뮤지컬 <몽유도원도>는 2002년 11월 15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첫 선을 보일 예정이다.
"브로드웨이는 이미 소재가 바닥났다. 동양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 작품을 올린다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한국 뮤지컬의 대들보 윤호진은 밝히고 있다.
김희갑, 양인자, 피터 케이, 박동우, 서병구 등 그간 국내외 공연을 통해 글로벌 노하우를 축적한 한국 최고 스탭들이 뮤지컬 <몽유도원도>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이제 영화와 뮤지컬로도 소설 <몽유도원도>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 비해 동양의 설화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시점에 설화 '도미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 <몽유도원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적인 사랑, 전부를 거는 사랑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지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바뀌고 욱리하의 강물이 말라서 강바닥의 돌들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별들이 되는 개벽이 일어난다 하여도 신의 아내는 조금도 마음을 변치 않을 것입니다."
<몽유도원도>는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키는 자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운명이나 어떤 환경의 지배를 받아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그것을 믿고 간직하려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 인한 결과물이다. 최인호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오래된 사랑의 정의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