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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고 이를 미국 특사에게 시인했다는 미국측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북한 핵문제가 또 다시 한반도 정세의 최대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북한이 그동안 일관되게 부인해왔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시인한 것을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인했다는 미국측의 주장에는 몇 가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우선 과거 미국이 영변이나 금창리와 같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할 때 강력한 근거로 제시해왔던 북한의 핵무기 개발 '지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밀수입했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지도 않고 있다. 이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정보조차 제공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이를 둘러싼 국내외 언론들의 '설(說)'만 난무할 뿐이다.
또 한가지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인했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이 부분 역시 석연치 않다. 10월 17일 CNN에 보도된 내용은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강석주 외무성 제1부부상을 몰아붙이자, 강석주 부부상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래, 우리는 핵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를 가지고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인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CNN 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인정했다는 것은 '핵무기 프로그램'이 아니라, '핵 프로그램'이다. 이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이 '동결'해야할 핵 프로그램은 무기급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흑연감속로 및 이와 관련 시설들이다.
여기에는 우라늄 시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북한이 우라늄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기 때문에 북한이 우라늄 시설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를 북한이 핵무기 개발 증거로 단정하거나, 제네바 합의 등 반핵 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북한이 외국에서 농축 우라늄을 수입했다거나, 자체적으로 농축 우라늄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은 물론, 한반도 비핵화선언과 경수로 공급협정 등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이 우라늄 시설을 보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핵무기 제조용 '농축' 시설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에 사용할 '정련' 시설인지는 아직 불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 발표와 미국측의 구체적인 증거 제시 이후에 판단할 문제인 것이다.
미국 강경파의 의도적 농간일 가능성 높아
미국측의 발표 내용은 물론이고, 발표 시점과 방식도 의구심을 갖게 한다. 왜 미국의 대북 특사가 돌아온 지 12일이나 지나서, 그것도 일과 시간이 끝난 후에 서둘러 발표를 했는가의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 북한의 핵개발 의혹 문제를 두고 부시 대통령 등이 참석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해결 방안을 두고 미적거리자, 행정부 내 강경파가 의도적으로 일부 언론에 정보를 흘리고, 이를 포착한 백악관이 서둘러 발표했다는 미국 언론들의 보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북핵 의혹이 제기되자 NSC 회의에서 '테러와의 전쟁' 다음 목표물을 이라크와 북한 중 어느 나라를 삼아야 할지 논란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부 관리들은 북한의 핵개발 증거가 확실해진 만큼, 북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문했을 것이고, 대이라크 전쟁에 공을 들여온 대다수 관리들은 동북아에서 긴장이 고조되면 대이라크 전쟁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며, 문제를 키우지 말자는 주장을 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미국 언론보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한가지 문제는 부시 행정부의 관리들이 10월 3-5일 사이의 북미간의 대화내용 전반을 밝히지 않고, 구미에 맞는 말만 '짜깁기'식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인과 반핵협정 파기 의사 등만을 흘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94년 3월 판문점 남북회담 때, 북측 대표의 발언을 거두절미하고 '서울 불바다 발언'만 한미 정부가 공개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공세의 빌미를 마련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의 특사 파견으로 이뤄진 북미대화에서 북한이 원하는 것은 '협상'이었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측이 제시하는 핵개발 증거에 대해 일부 시인을 해서라도 협상 타결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특사단은 미국측의 '우려 사안'만 늘어놓고 북한측의 협상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최근 백악관과 국무부가 '우리가 제기하는 우려 사항을 북한이 먼저 풀면,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는 '조건부' 관계 개선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주고받기식의 '상호주의'였지만, 미국이 북한에게 압박한 것은 '북한의 先 무장해제, 미국의 後 대북관계 개선'으로, 이는 북한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미국측의 발표 내용이 대단히 편향된 것이라는 점은, 이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만 공개하고 북한측의 협상안은 전혀 공개하지 않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남북관계와 북일관계의 급진전으로 뒤로 처졌던 미국이 또 다시 한반도와 동북아 문제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된 것이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북한?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관리 대부분이 제네바 합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를 먼저 파기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만만치 않아, 제네바 합의를 성실히 이행하지도, 그렇다고 먼저 파기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비밀리에 핵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반핵 협정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겠다고 '해석'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하자, 부시 행정부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라며 이를 제네바 합의 파기의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부시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 파기가능성을 여러 차례 내비쳐왔다. 부시 대통령이 2002년 3월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미 의회에 확인해주는 것을 최초로 거부한 것은, 부시 행정부가 제네바 합의 파기수순을 밟고 있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북한과 미국 양측은 상대방이 먼저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지 않는 한, 성실히 준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으나, 양측 모두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미국측에서 약속한 경수로 사업이 5-6년 이상 지체됨에 따라 막대한 전력 손실이 불가피하고 정치적, 경제적 관계 정상화 약속도 거의 지키지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선제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도 큰 불만 요인이다.
반면 미국측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네바 합의 자체를 싫어할뿐더러 북한이 핵사찰을 받을 시기가 되었는데 받지 않고 있다면 제네바 합의를 파기할 가능성을 내비쳐온 것이다. 이러한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불안한 균형을 유지해왔던 제네바 합의는 이번 북한 핵파문을 통해 줄이 끊어질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가 바라던 바이기도 하다.
북한의 벼랑끝 전술인가?
만약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인했다는 미국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미국의 안보전문연구기관인 노틸러스 연구소의 피터 헤이즈 소장은 17일 홈페이지(www.nautilus.org)에 올린 글에서 두 가지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하나는 지난 2년간 북한을 철저하게 무시해온 부시 행정부를 다시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기 위한,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일종의 '벼량끝 전술'을 구사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갈수록 균형이 무너지고 있는 재래식 군사력을 만회하고 위해 최후의 카드인 핵무장 옵션을 포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즉, 억지력 차원에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기 전에 미국의 공격이 될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국제사회에서 고립이 가속화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억지력 차원에서 핵무기 보유를 시도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 발표나 미국측에서 추가적인 정보 공개가 없는 상태에서 북한의 의도를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동시에 북한으로서는 어떠한 입장을 밝히기도 힘든 상황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북한의 강한 부정은 한-미-일 강경파들에게 강한 긍정으로 해석되어 왔기 때문에, 북한이 핵개발 및 이를 시인했다는 미국측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줄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를 공식 확인한다는 것은 국제조약인 핵확산금지조약(NPT), 북미간의 합의인 제네바 합의, 남북간의 합의 사항인 한반도 비핵화선언 등을 모두 위반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결과이기 때문에, '자책골'을 넣은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핵개발을 시인했다는 미국의 주장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벼랑끝 전술'이나 '핵무장'과 같은 예단을 내리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이번 파문을 북한이 즐겨 사용한다는 '벼랑끝 전술'로 보는 것은 전형적인 미국 강경파의 사고이다. 93-94년 핵위기, 98년 금창리 핵의혹 시설 논란, 98-99년 미사일 위기 등을 겪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북한이 벼랑끝 전술을 쓴다기보다는 미국이 북한을 벼랑끝으로 몰고 가면서 벼랑끝 전술을 쓰고 있다고 북한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주의는 부시 행정부 들어 극에 달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을 벼랑끝으로 몰고 나서, 무릎 꿇고 빌든지 아니면 벼랑끝으로 떨어지든지 양자택일하라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에 쉽게 굴복할 북한이 아니다는 점이 부시 행정부의 딜레마 아닌 딜레마이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라크의 경우에는 미국이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벼랑끝으로 떨어뜨릴 수 있으나, 북한의 경우에는 미국도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잘 알고 있을 북한은 벼랑끝에서 미국에 무릎을 꿇는 수모를 당하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벼랑끝에서 일단 벗어나 함께 문제해결을 시도해보자고 미국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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