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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와 반미가 혼재하는 한국사회에 혼란을 느낀다는 벤 케시던씨.
친미와 반미가 혼재하는 한국사회에 혼란을 느낀다는 벤 케시던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벤 케시던(Ben Cashdan, 38세)은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활동중인 영국출신의 미디어활동가이다.

미디어활동을 '기술'이나 '예술성'의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와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극복하는 활동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그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미디어 활동가이다. 그는 발제를 통해 한국의 퍼블릭엑세스 운동에 대해 "부분에 집착하여 큰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고 미디어운동과 정치. 사회적 운동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1990년 남아공으로 건너간 그는 남아공 무역조합연합, 남아공 시민연대와 아프리카 국가협회 등을 포함한 남아공 주요 단체들에서 일했으며 90년대 중반 집권한 넬슨만델라 정부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경력만큼 학벌도 단단하다. 캠브리지 대학 사회정치학과를 졸업한 벤은 1996년 런던경제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1998년부터 2년간 미국 볼티모어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경제지리학을 공부했다.

또한 벤은 영국 가디안지와 BBC에서 일하기도 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 퍼블릭엑세스영상제(10월 18일-20일) 부대행사로 지난 10월 17일 오후 2시 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가진 '미디어 운동 국제협력을 위한 심포지움' 참석차 내한한 벤을 지난 10월 21일 오후 7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실(서울 시청 앞 언론재단 소재)에서 만나보았다(통역 문혜진).

미국적 생활방식과 반미가 혼재한 나라

- 바쁘신데 시간 내 주어 감사합니다. 벤 오늘 민중의 소리 방송국과 영상미디어센터, 그리고 언론 노조를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여러 분을 만났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국 일부 그룹의 '반미성향'이 대단히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을 정리하기가 힘듭니다. 혼돈스러워요. 뭐랄까. 한편에서는 강하게 반미를 외치고 있는데 미국식 생활방식은 곳곳에 배어있고. 하여간 정리하기가 힘듭니다."

- 한국사회 전체가 미국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가운데 한쪽에서 반미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서 오는 혼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똑같이 반미를 이야기해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다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반미'라는 말에 반대합니다. 도대체 반미라는 게 누구를 반대한다는 것인가가 불분명하거든요. 그렇다면 미국 내에 있는 이민 노동자들, 가난한 흑인들도 모두 반미 대상인가. 오히려 미국의 자본가나 정치인들 즉 미국의 지배자들에 국한하여 반대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반미운동을 하면서 운동대상을 '미국'으로만 국한시키는 것도 문제라고 봐요. 분명히 한국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미국으로 인혜 이익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고. 미국이 다른 나라에 들어와 어떤 일을 꾸밀 때 그나라 내에 동조하는 세력이 없다면 뿌리내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든요."

- 지금 지적하신 문제는 우리나라의 안티세력들 간에 있어왔던 오랜 논쟁의 핵심인데, 빠른 시간 안에 잘 파악하셨네요.(웃음)
"방금 전에 한국 미디어활동가인 김명준씨를 만나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거든요."

- 반미운동 부분에 대한 지적은 숙고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한국사람들은 벤의 경력 중에 BBC 전직 PD라는 점에 주목할 겁니다. 그런데 심포지엄에서 발제하시는 것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제가 방송국에 입사하기 위해 시험을 치른 것은 아닙니다. 1985년부터 1987년 사이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했고 그와 관련된 영상물을 만든 일이 있습니다. 그 영상물을 방송국관계자들이 보고 저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것이지요."

-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특채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제가 만든 영상물이 방송에 나간이후 BBC와 팔레스타인 지원투쟁에 관한 영상물을 계속 만들었습니다."

- 영상물 제작법은 어떻게 익히셨어요.
"투쟁을 하다보니까 영상물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우리나라로 치면 시민단체의 영상 제작교육같은-기자 주) 공동체에서 하는 교육을 받았지요."

학생시절 팔레스타인 지원투쟁

- 영국은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벤도 영국인이지 않습니까.
"영국은 인종차별이 매우 심합니다. 그리고 대처가 집권한 이후 영국만을 위한 영국정책을 쓰면서 내면적으로 인종차별적 요소는 더 심화 되었구요."

- 처음에 만나 몇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어쩐지 영국에 대해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틀렸으면 좋겠는데요.
"저는 유태인입니다. 영국 내에서 유태인은 소수민족이고, 음으로 양으로 불이익을 많이 당하죠.

한편으로는 유태인으로서 불이익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민족에 대해 인종차별을 행하는 유태인의 현실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저희 이모 두 분이 팔레스타인에 살고 계셔서 두어 차례 이모댁에 가게 된 일이 있는데. 두분 모두 대단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시더군요."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유태인이면서 팔레스타인 지원투쟁을 한다는게 쉬운 일 일 것 같지 않은데요.
"제가 가족과 함께 팔레스타인에 갔을 때 이스라엘 수상이 하는 연설을 듣게 되었어요. 그는 '이스라엘사람들을 위해, 전세계 유태인의 이름으로' 이러저러한 일을 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어요. '언제 내가 너에게 유태인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권한을 주었나' 수많은 유태인을 이용해 수상이 정치를 하는 행동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에서 살면서 유태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유태인이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습니다. 심지어 얻어맞은 일도 있구요. 팔레스타인에 다녀온 뒤 '진짜 유태인'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유태인 그룹'의 멤버가 되었지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반대하면 욕도 먹고 그러지만 유태인이 이스라엘을 반대하면 그런 박해는 받지 않아요. 어쨌든 유태인은 1,2차 세계대전 때 인종차별로 인해 엄청난 희생을 당했으면서도 스스로 인종차별을 이스라엘 유지의 기초로 삼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권력자들은 우리를 'self haters'라고 불렀지요."

- 스스로의 정체성 일부를 부정하는 일을 하게 되신 거네요.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잘못', 이를테면 인종차별적 행위들을 반대하게 된 것이지요."

- 부모님들은 당신의 행동을 이해해주셨나요?
"우리 어머니는 영국 내 핵무기를 적재한 미군부대 앞에서 반핵 시위를 할 정도로 진보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에게 '이스라엘 사람이니까 이스라엘을 지지해야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계속해서 반 이스라엘 투쟁을 벌여나가자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랜 대화를 통해 이스라엘의 '인종차별'이 나쁜 것이라는데 동의하셨지요."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기 위해 남아공으로

- 남아공에는 왜 가셨습니까. 영국 내에서 유태인권익보호를 위해 일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게다가 그것이 벤과 가장 가까운 문제가 아닙가요.
"그렇습니다. 영국내에서 할 일이 있었어요. 그러나 같이 학생운동을 하던 활동가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기 위해 일하자고 제의했고, 영국내에서 남아공 연대를 만들어 남아공물건 사지 않기 운동 등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아공이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곳이라고 생각하여 남아공으로 가게 되었지요."

- 넬슨 만델라가 1990년 초에 출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네. 그가 1990년 2월에 출소했고 제가 남아공에 도착한 것은 그해 9월이었습니다. ANC라는 신문사에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new nation'이라는 신문사에서 창밖을 내려다보게 되었는데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지요. 신문사 앞 교차로에 시위대들이 운집해 있고 빌딩위에서 시위대를 향하여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 1990년이면 아파르트헤이트정권 말기인데, 그때도 학살이 심했던가요.
"그땐 세계가 아파르트헤이트정권이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고 정권 스스로도 자신들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말기에 학살이 심했어요. 구정권은 남아공이 공산주의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학살을 자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 만델라정권 고문으로도 활동하셨다죠?
"제가 무엇을 해 주었다기 보다는 남아공인들으로부터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남아공의 가능성과 영감을 믿어요. 그리고 남아공의 관용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정권으로부터 그토록 핍박을 받고도 곧 '새로운 사회를 위해 함께 해보자'고 할 수 있는 태도에 놀랐습니다."

- 그건 약해서 그런 것 아닌가요? 남아공 흑인들이 아직 힘이 없어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넬슨 만델라는 출소하자마자 '용서하는 것이 투쟁하는 것보다 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스스로 그말을 실천했습니다."

- 영국사람이면서 남아공에 살고 계시니까 부모님, 특히 어머님이 보고 싶을텐데요. 고향이 그립지는 않나요.
"어머님이 보고 싶지요. 그리워요. 그런데 한국이나 일본에 오면 민족이라든가 국적 같은 것을 너무나 따져서 무서울 때가 있어요."

- 일본은 섬이어서 그럴 것 같구요. 남한은 분단으로 인해 '섬 아닌 섬'이 되어서 아무래도 폐쇄적일 수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민족이나 국적 같은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아닌가요.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요. 저는 지금 남아공에 12년째 살고 있는데, 제가 영국인인지 남아공인인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팔레스타인에 살 때에는 내가 팔레스타인인지 이스라엘인인지,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국적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결혼은 안 하십니까.
"사랑했던 여인과 남아공에서 10년 정도 함께 살다 헤어졌습니다."

- 부모님은 손주를 원하시지 않나요.
"어머님이 결혼생활의 고통을 아주 잘 아셔서 강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 어려운 질문을 하나 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요.
"뭐든, 물어보세요."

- 왜 만델라는 위니 만델라와 헤어졌나요. 오랫동안 몹시 궁금했답니다.
"위니 만델라가 감옥에 있는 동안 자기관리를 잘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부에선 위니 만델라에게 다른 애인이 있었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구요. 어쨌든 넬슨 만델라가 성장하는데 반해 위니 만델라는 그 성장을 따라가지 못했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 피곤하신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한국 내 활동가들과 교류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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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민언련 사무총장, 상임대표 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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