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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이제는 중심을 잡고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핵 문제를 풀기 위한 '정직한 중재'에 나서야 한다.

미국의 입장은 간결하다. 북한이 무조건 핵을 먼저 폐기하라는 것이다. 그 뒤라야 대화를 해도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폐기'에는 '검증'도 포함된다.

북한 역시 완강하다. 불가침 조약을 체결해 자신의 안전 보장을 해주면, 이른바 안보 우려 사항을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언뜻 접점이 없어 보인다.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1차적 차원이 아니고, 테러와의 전쟁과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이라는 3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더욱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불신이 강한데다,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어기고 우라늄 농축이라는 부도덕한 짓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북한과의 대화 자체를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북한 핵 문제의 해법은 이미 상당 부분 제시되고 있다. 지난 90년대의 북·미 대결을 어떻게 풀어 나갔는지를 살펴보면, 대강의 그림이 나온다. 지난 93년에서 94년까지의 1차 북한 핵 위기는, 한반도를 전쟁 직전까지의 긴급한 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북·미는 '제네바 합의'(Agreed Framework,AF)를 이끌어 냈다. 뒤이은 98년과 99년의 금창리 사태와 대포동 미사일 위기 상황에서, 북·미는 '페리 프로세스'(Perry Process, PP)라는 틀에 합의했다.(물론 각각의 합의에는 많은 결함이 있다. AF의 경우, 북한 붕괴론을 믿은 미국이 합의를 서두른 탓에 '핵 사찰' 시점 등 많은 허점을 보이고 있다. 또 PP의 경우에도 북한 고위급 인사의 미국 방문이 늦어져 북·미 관계 개선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6·25 이후 '불구대천의 원쑤'이며 '존재해서는 안되는 스탈린 체제'의 두 나라가, 협상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면서, 타협이 성공할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을 한 것이다.

지난 90년대 두 번의 역사적 합의는, 북·미 문제가 '포괄적 타결'의 '동시 이행'으로 해결의 가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같은 경험은, 최근의 북·미 대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체제 보장과 경제 지원 요구와, 미국의 핵과 미사일, 생화학 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 문제 해결과 재래식 군사력 축소 요구 사안을 포괄적으로 맞바꾸는 것이다. 비슷한 방안으로, 1차적으로 핵 문제와 체제 보장·경제 지원을 '동시 이행'한 뒤, 2차적으로 미사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두 방안 모두 중요한 점은, '포괄절 타결을 단계적으로 이루며, 각 단계를 상호 동시에 이행'한다는 것이다. 또 재래식 군사력 문제는, 주한미군 문제와 남북 군비 통제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다뤄야 한다.

후자의 방안을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북한은 우라늄과 플루토늄 등 핵 개발을 완전 포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 사찰 등을 수용할 의사를 밝힌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북한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의사를 나타낸다. 이후 북·미는 핵 개발 포기·검증과 불가침 조약 체결을 놓고 협상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손해볼 것이 없다. 세종연구소 이종석 박사는, 불가침 조약 제의를 눈여겨볼 때 북한이 보상 등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지 않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기자와의 11월 7일 인터뷰).

지난 2일부터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 역시 기자회견에서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즉 미국으로서는 '돈'들이지 않고 북한의 핵 폐기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북한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대 국제관계대학원의 박건영 교수는, 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에서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태도 여하에 따라 협상을 계속 진행할 수도 있고, 조약을 체결한 뒤에라도 파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지난 5일, '대북 인식과 대북 정책 재론' 학술 대회).

북한과 미국이 불가침 조약 체결을 통한 체제 보장과 핵 폐기를 성공적으로 '동시 이행'한다면, 다음 순서는 미사일 문제다. 미사일 협상은 지난 2000년 북·미가 타결 직전까지 갔던 축적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핵 문제보다 쉽게 풀 수 있다. 북한과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사정거리 500km 이상 미사일(대포동 1,2호 같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포함하는 장거리)에 대한 협상을 거의 마무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입장을 되살린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대전제는 북한이 미사일 개발과 실험, 배치, 수출을 포기하고, 미국은 상응하는 경제 보상을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북한에 줘야 할 경제 협력 자금이 미사일 협상의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포괄적 타결의 동시 이행'이 실제로 이뤄지기란 지극히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미국이 전혀 움직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측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남측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강경 일변도의 미국에 일정 부분 제동을 걸고 있다. 지난달의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남북 관계와 북일 대화의 유용성'을 명시하도록 한 것은 적잖은 성과다.

이제부터가 문제다. 공식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은 대북 중유 공급과 경수로 건설 공사 중단, AF의 파기 등의 채찍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다행히 일본은 중유 공급 중단을 해도 단계적으로 한다는데 남측과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 강경 드라이브를 막고, 한·미·일이 합의한 평화적 해결을 이끌어 내기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해법은 없는가? 있다. 남측은 북한이 아니고 미국을 움직여야 한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등 WMD 카드 말고는 미국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이것은 지난 90년대 두 차례의 위기 상황이 잘 보여준다. AF는 핵으로, PP는 미사일로 이끌어낸 성과다. 만약 북한이 이 카드를 버린다면, 미국이 북한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미국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같은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또 미국에게 북한과의 대화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경제 제재와 외교적 압박 등은 북한 문제의 해결은커녕 한반도에 긴장만 가져온다는 점을 적시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북한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한 적이 없다. 흔히 북한이 '벼랑 끝 외교'를 쓴다고 비난하지만, 뒤집어 보면 미국이 북한을 '벼랑 끝'으로 내민 측면이 강하다.

이와 함께 미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을 미국이 해소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미국은 북한을 믿을 수 없으며 존재해서는 안될 국가라고 몰아 부치지만, 미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 역시 더하면 더했지 결코 작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AF 이행 문제다.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지만, 정부 당국자들의 비공식적 평가와 전문가들의 분석 가운데 상당 부분은, 미국이 결코 북한보다 약속을 더 잘 지켰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경수로 완공의 지연, 중유 공급 논란, 소극적 안전 보장(NSA)과 궁극적인 관계 정상화 약속 불이행 등 미국이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핵 폐기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은 자신이 먼저 핵을 폐기한다고 해서 미국이, 북한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으로 믿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요구를 들고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북한은 자신이 핵을 완전 포기한다 해도, 미국은 결코 체제 보장과 경제 지원을 주지 않을 것이며, 더 나아가 미사일 문제와 재래식 군사력 문제, 인권 문제 등을 걸고넘어질 것으로 우려한다.

궁극적으로는, 미국이 북한을 살려주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 "이라크와는 다르다"는 미국의 기본 입장을 고리로 삼아, 북한의 체제 보장을 대가로 하는 WMD 문제 해결이 1차적으로는 대테러 전쟁의 또다른 성과이며, 2차적으로는 부시가 언급한 '평화적 무장 해제'의 전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더욱이 북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했을 경우, 북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며, 그 만큼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 구상에도 유리하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남측의 이같은 중재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에 치중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단호하게 이뤄져야 한다. 결코 미국의 이익이 한국의 이익과 같을 수 없으며, 미국의 정책이 한반도를 위기로 몰아 갈 수 있다면 공조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입장을 추수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되풀이하는 얘기지만, 남측은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한반도 평화'라는 관점을 반드시 관철하기 위해 '중직한 중재자'가 돼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포괄적 타결의 동시 이행'이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한·미·일의 빈틈없는 공조라는 틀 속에서 미국에 휘둘리지 말고, 한반도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리고 이같은 설득과 중재는, 늦춰서는 안된다. 남쪽에서의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꼭 지적해야 할 것이, 본 기자를 포함한 언론의 역할이다. 지금과 같은 '미국 입장 중계방송'은 안 된다. 미국의 움직임을 '사실(fact)'로 전달하는 것은 1차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숨은 의미를 '한반도의 관점'에서 낱낱이 분석하고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남측의 여론이 형성될 것이고, 이같은 여론은 우리 정부에게 큰 힘을 줄 것이다. '한반도의 관점'이 빠진, '부시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고,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저렇게 밝혔고'하는 보도는 한반도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겠다는 미필적 고의에 다름 아니다.

또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한반도의 관점'에서 비판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를 지키고 통일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펴는지, 아니면 초강대국 미국의 논리에 휩쓸려 좌초하는 것은 아닌지를 보도해야 한다. 더욱이 자신들의 당파적 이익에 맞는 부분만 확대 보도해서는 안 된다. 입맛대로 보도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는, 반민족적이라는 비판 앞에서 떳떳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외환위기 사태 때의 자기 반성이 다시 필요하다. 당시 언론은 한국 경제의 난파 상황을 예측하지도, 그에 따른 위기 경보를 울리지도 못했다. 현재의 언론도 한반도 상황에 대한 경보를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자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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