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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지지율 3.8%. 무슨 종합일간지에서 조사한 정기 여론조사의 결과가 아니다. 시사저널에서 '대학생들의 의식구조'를 알아보기 위해 1500명에 달하는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의 일부이다.
흔히들 20대,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학생들은 다른 세대나 계층에 비해 진보적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11월 18일자 동아일보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권영길 후보의 지지율은 다자대결 구도때 2.2%였고, 정몽준 후보로 단일화되었을 때는 4.3%였다. 다른 세대나 대학생들이나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다른 설문조항도 많았는데 왜 하필 권영길 지지율만 가지고 이 난리냐 하고 물으실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우선 필자는 '대학생들은 무조건 진보적이어야 하므로 가장 진보적인 민주노동당의 후보를 찍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님을 밝혀두고자 한다.
다만 대학생들은 그래도 좀더 이념적으로 선명한 진보성을 가진 집단이 아닐까 하고 기대를 거는 사람들의 착각을 차단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한 것일 뿐이다.
물론 대학생들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율은 16.7%로 전체적인 지지율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그러나 이것만을 가지고 대학생들의 진보적 성향을 입증해낼 수는 없다. 진보라는 언어는 "반창(反昌)"과 결코 의미상으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집단이 진보적이라 칭하려면 진보성을 내세우는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권영길은 차치하고라도 노무현의 지지율마저 정몽준에게 5% 이상 뒤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대학생들 사이에 '노무현의 3대 착각 중 하나가 대학생들은 다 자신을 지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유머까지 나돌겠는가.
반면 연애/결혼관에서는 '처음 본 사람과도 성적 관계를 나눌 수 있다'에 남학생의 59%, 여학생의 24%가 찬성한 점. 기업관에서는 60%에 가까운 대학생들이 선호하는 기업으로 삼성을 지목했다. 공무원 사회에서도 발생하는 노동조합을 여전히 허용치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기업의 대표적 자랑거리 중 하나로 내세우는 삼성이 과반수 이상 대학생들의 최우선 선호 기업이라니 다소 당혹스럽다.
이러한 현상을 시사저널에서는 '정치적 보수화, 개인적 삶의 양식은 자유화'라는 문구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행태상의 이중성이라는 의미를 담지한 듯한 이 문구에 동의하기 힘들다. '총체적인 탈정치화'라는 말이 더욱 이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규항이 말한 대로 진보는 '일부러 선택한 상태'이기 때문에, 온통 보수적 스펙트럼 일색인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현상들의 이면, 행간을 읽어낼 수 있는 정치적 문활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현실 정치 인식, 대통령 선거 인식, 미시적으로 그들의 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및 학생 사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인식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행간을 읽어내는 데에서 파생될 수 있는 "색깔있는" 정세인식은 찾아보기 힘들며 언론에 의해 설정된 '걸러진 의제'를 따라가기도 급급해 보일 때가 많다.
20대의 투표율은 언제나 전체 투표율보다 낮으며, 대학 내의 총학생회 선거를 봐도 이틀의 선거 일정 동안 투표율 50%를 넘기는 대학은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입증하며, 이러한 현상은 결코 '보수화'라 할 수 없다.
한때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당선되는 추세 속에서 '대학생들의 보수화'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대학 학생회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때로는 운동권 여부보다는 후보 중에 '꽃미남, 꽃미녀'가 있는가라는 부분이 될 수 있다니 이를 어찌 '보수화'라 하겠는가? '정책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잘 생겨서',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올라가서'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는 비율이 상당하다는 사실이 '보수화'라는 용어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개인적 삶의 양식이 자유화 되었다'라는 진단도 맘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 말은 정치 등의 사회적 거대 담론에 대해서는 일부 무관심해질 수 있으나 자신의 삶에 깊숙히 개입하는 미시적 억압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저항한다는 이야기라는 말로도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휴대폰의 디자인과 기능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비합리적으로 책정된 휴대폰의 가격 인하 논의에 대해서는 침묵한 그들을, 포털 사이트 내의 아바타 꾸미기에는 열중하면서 시나브로 진행되는 유료화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그들을, 성 의식의 자유는 확대되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공고한 성 역할 고정관념 및 성폭력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 깃든 그들을 과연 '자유화'되었다고 일컬을 수 있겠는가라는 이야기다.
물론 대학생 집단 전체가 다 이러한 경향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을 지닌 '탈정치화된' 세력이 대학생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았음은 누구도 함부로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90년대 초반의 '모두가 마르크스 등의 사회과학적 서적을 읽어야만 하는' 또 다른 획일의 사회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 존재했던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흐름이 약화되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다.
좌파적 생각은 갖고 있을지 몰라도 그 생각을 현실에 기초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들은 '무늬만 좌파'라고 지적당해왔다. 그러나 새롭게 제안한다. '무늬만 좌파'이어도 좋다. 생각하자. 우리의 삶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하고,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고민하자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좌파인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좌파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갖지 말길 바란다. 사설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한 채 '개폐'라는 타협적 용어로 슬쩍 넘어가는 한겨레신문이 '노동신문 서울지국'으로 판명받기도 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친미는 헌법 이상의 국민적 합의'라고 주장하는 언론이 - 프랑스의 극우파 르펜조차도 때로는 반미의 입장을 취한다 - 10년 넘게 영향력 1위를 차지한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좌파는 그만큼 더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닐 수 있다. 다른 사회에서는 '상식'인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좌파'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하는 이야기다. '무늬만 좌파'이어도 좋다. 개별적 삶의 습속에 깊숙히 개입된 '탈정치화'를 명확히 주시하고 이 상태로부터 함께 탈출해 나가고자 감히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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