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일요일) 오후 6시. 평소 같으면 고시생으로 북적거릴 신림 9동 '고시촌'에 오늘따라 오가는 이가 드물다. 인근 술집이나 찻집에도 손님이 적다. 오전 내내 뿌리던 비가 그친 뒤 기온이 뚝 떨어져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회창이 당선되면 합격자 수를 줄일게 뻔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조급한가봐요". 월식 집에서 저녁을 떼운 사법고시생 이모씨(30세)가 독서실로 잰걸음을 한다. 1차 시험을 아직 3개월여 남겨뒀건만 벌써부터 수험생들이 막바지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얘기다.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쁜 건 대권을 바라보며 탈당에 여념이 없는 정치철새들만이 아닌 듯하다.
회창 당선 = 사법개혁의 종말?
'합격' 하나를 위해 책을 파느라 온갖 세상만사를 잊고 살던 고시생들이 때아닌 대선 바람에 휩싸이고 있다.
"모처럼 술 한잔 먹는 자리에서 대통령이다 국회의원이다, 선거얘기 하기도 했지만 전에는 그냥 뭐랄까? 강건너 불구경이랄까...".
고시촌 한 귀퉁이 곱창집에서 학교 선후배들과 모인 이모씨(32세, 건국대 졸)가 '정치에는 문외한'이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런데 요즘 달라졌어요. 판사출신이 당선되면 합격하기 힘들어진다나 어쨌다나. 저마다 한마디씩 하더라고..."
정치라면 내 알 바 아니라던 고시생들이 이번 대선 결과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얘기다. 대통령 당선자가 이회창 후보냐, 노무현 후보냐에 따라 사법개혁의 생존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정원동결로 뱃구레를 채운다
사법개혁은 김영삼 정부부터 시작돼 김대중 정부까지 이르고 있지만 이미 용두사미가 된지 오래다. 초기에는 미국 '로스쿨(law-school)'제도를 도입한다느니 수선을 떨었지만 결국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기존 법조계에 밀려 합격자 수를 단계적으로 늘이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 잡았을 뿐이다.
물론 득이 없는 것도 아니다. 높디높던 고시문턱이 낮춰져서 지난 2001년 제43회 사법고시의 경우 최종합격자가 991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2005년까지 합격정원을 2,500여 명으로 확대하겠다던 사법개혁의 애당초 계획 중에 하나는 그나마 꾸준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가 당선될 경우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사법개혁'이 아예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고시생들을 들썩이게 만들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보수 아닙니까? 그러니까 기득권 층 주장에 손들어 줄거고, 당연히 기성 법조인들 밥그릇 챙겨주려고 합격자수 줄이지 않겠어요?"
커피 자판기가 설치된 가게에서 만난 고시 10년차 정모씨(40세)는 "덕분에 자기 같은 '장수생'들만 더 불안해졌다"며 투덜거렸다. 지난 1월 사법시험 담당기관이 행자부에서 법무부로 바뀌면서 기성 법조계의 요구에 따라 정원축소는 식은 죽 먹기가 된 터라 단순히 넘겨집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사법개혁은 당연히 서비스 소비자가 무엇을 바라느냐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대다수 서민들은 보다 많은 전문가를 배출해 보다 저렴한 대가로 손쉽고 편안하게 법률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우선 합격정원을 늘려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문제를 개선해야한다. 서비스 질의 하락을 운운하며 정원동결을 내세우는 기성 법조인들의 주장에는 '제 뱃구레를 채우려는 욕심'이 가득하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2월 18일 독서실 개방
"사실 우리도 할말은 없죠. 누가 당선되면 우리 밥그릇 커질지도 모르고, 누가 당선되면 그네들 밥그릇 커지고..."
대선 때 투표하러 갈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장수생 정모씨가 손을 내지르며 '바쁘다'고 한다. '뭐든지 법대로'한다는 대쪽 판사출신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2천여명을 선발하는 사법고시 1차에 합격하기 위해서 말이다. 2002년 12월 18일에 그는 독서실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기사내용은 기자가 만난 일부 고시생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일 뿐 모든 고시생의 의견과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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