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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아파트 단지 이웃 동에 사시는 아버지께 새삼스럽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영 어색하고 낯설어서 노인복지 이야기로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노년기의 가족관계를 연구한 학자들이, 노인분들은 자녀들과 별거하는 것을 원하지만 동시에 가까이 살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요. 그래서 이런 태도를 가리켜 "거리를 둔 친밀(Intimacy at a Distance)"이라고 이름을 붙였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자식네와의 거리는 "국이 식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제일 좋다는 말로 대신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약수터에서 물을 떠다 드시던 시절에는 운동 삼아 하시는 거라면서 저희 집에 물을 길어다 주시더니, 정수기를 놓으신 후에는 집도 좁은데 너희까지 설치할 필요있느냐면서 매일 물을 받아다 주시는 아버지. "국이 식지 않는 거리"의 즐거움은 노인이신 아버지, 어머니가 누리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저만 맘껏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현관문을 열고 나가던 윤이 아비가 놀라서 저를 부르더군요. 문 앞에는 물통이 올망졸망 놓여 있었습니다. 늦잠 자는 저희 식구들 깰세라 물통만 살짝 내려놓고 그냥 가신 거지요.

제 나이 마흔 셋이 되도록 부모님 슬하를 벗어나지 못해 아직도 미성숙하기 이를데 없는 딸이지만, 그래도 80세, 75세이신 부모님께서 건강하고 사이좋게 곁에 살고 계셔서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지금의 깨끗하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합니다.

이 책은 간암 진단을 받으신 아버지 목사님과 아들 목사님이 약 4개월간의 투병 기간을 함께 보내면서 아버지와 아들로, 신학 공부를 한 목사 선후배로, 또한 인생의 스승과 제자로 나눈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다른 환자와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늘 삶과 죽음에 대해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목회자 가정에 닥친 병과 고통은 또 다른 어려움으로 가족들 앞에 놓이게 되지요.

회복될 수 없는 말기암이 곧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환자이신 아버지 목사님이 가장 먼저 받아들이십니다. 아내와 아들, 딸 등 가족들은 그 시기와 방법을 각각 달리하며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어찌나 아름답고 감동적인지요.

아버지 목사님은 그 어려운 투병 기간 동안에도 강의나 설교 등 하실 수 있는 한 일상의 일들에 최선을 다하시면서, 구술로 장례식의 설교문까지 직접 작성을 하십니다. 관에 쓸 나무는 물론이고 관 위에 덮을 하얀 천과 그 위에 쓸 글씨의 내용, 자신의 묘비명까지 자녀들을 통해 다 준비하십니다.

묘비에 목사라는 칭호를 쓰지 마라, 장례식 때 가족들 모두 상복을 입지 말고 깨끗한 정장 차림이면 된다, 지나치게 슬퍼하지는 마라, 부조는 받지 않도록 해라, 장례 예배 때 일체의 조사나 약력 소개를 하지 마라…

말기암으로 고통을 겪으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가족들은 목이 메이고 눈물이 쏟아지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의연하신 모습에 영향을 받아 죽음을 앞둔 전 과정을 아름답게 감당해 나갑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저자는 인간의 고통, 삶과 죽음, 부활 등 기독교의 근본적인 것들을 아버지께 여쭙고 토론하며 하나씩 정리하고 기록하게 됩니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쯤, 아버지 목사님은 아들에게 링거 주사를 뽑아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안락사가 아니라, 인위적인 것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라고 덧붙이시면서요.

이 후 성만찬 예식을 한 번 하시고, 아버지 목사님은 가족들이 한 사람씩 작별 인사를 하는 가운데 고요히 마지막 숨을 내쉬셨습니다.

아버지, 건강하신 부모님께 세상 떠남에 대해 말씀드리기가 얼마나 송구하고 민망한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 책을 권해드리는 것은 아버지, 엄마가 살아오신 것만큼 떠나시는 것도 그렇게 아름다우셨으면 해서입니다.

늙음이 젊은 시절 살아낸 삶의 결과이듯 죽음은 우리들 생 전체의 가장 소중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삼남매와 일곱 명의 손자녀들에게 지금껏 주신 사랑을 아름다운 마무리로 완성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 이 책을 권해드리는 막내의 마음을 넓은 사랑과 이해심으로 받아주세요. 그리고 이건 처음 말씀 드리는 건데 솔직히 저희 부부도 아버지, 엄마처럼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사이좋게 서로 애틋하게 여기며 살고 싶답니다.

(빛, 색깔, 공기-죽음을 사이에 둔 두 신학자의 대화, 김동건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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