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거름출판사)와 헨리 지루의 <교사는 지성인이다>(아침이슬)를 말하기 전에 두 가지 아쉬움을 얘기하고 싶다.
'정치편'이라는 부제를 단 <옥중수고1>이 번역된 것은 전두환 군사정권이 폭압적인 통치를 일삼았던 1986년이고, '철학·역사·문화편'이라는 부제를 단 <옥중수고2>가 번역된 것은 김영삼 정권이 소위 '문민통치'를 시작했던 1993년이다. 2권으로 나뉘어졌지만 사실 이 책은 Quintin Hoare와 Geoffrey Nowell Smith가 편집하고 영어로 번역한 <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of Antonio Gramsci >를 번역한 것이다.
편집자들이 밝히고 있듯이 < Prison Notebooks >는 그의 '지적인 전기'를 재구성하기 위해 감옥에서 저술된 방대한 원고를 추려놓은 것이고, 그 편집 순서는
1. 역사와 문화의 문제들: 지식인, 교육,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노트,
2. 정치에 대한 노트: 현대의 군주, 국가와 시민사회, 미국주의와 포드주의,
3. 실천철학: 철학연구, 맑시즘의 문제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먼저 번역된 부분은 중간부분인 '2. 정치에 대한 노트'이다. 그러다보니 지배/동의, 국가/시민사회, 헤게모니, 지역의 문제가 강조되었지만 그런 통치가 가능했던(실제로 그람시가 주목했던) '지식인', '교육'의 문제가 사장되어 버렸다. 지배와 해방이라는 극단 사이에서 '시소놀이를 하는 지식인과 교육'의 역할이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 '정치편'을 시급히(?) 요구했다면 원래의 편집순서라도 밝혀야 하지 않았을까.
책의 제목은 사람의 첫인상과 같다. 첫인상이 오래 가듯이 제목이 주는 느낌도 오래 간다. 그렇게 볼 때, 지루의 책 < Teachers as intellectual >가 <교사는 지성인이다>라고 번역된 것은 잘못되었다(자연히 책 내에서도 '지식인'이 아니라 '지성인'으로 번역된다). 역자는 "지식인 개념을 일정한 하격을 가진 사람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아"(36쪽) 지성인으로 번역했다 하는데, 거꾸로 생각한 듯 하다. 한국사회에서 '지성인'이라는 개념은 허위적이고 공허한 '교양'이라는 개념과 분리될 수 없는 반면, 지루는 교사의 역할을 그람시적인 의미에서 '비판적' 지식인에서 찾고 있다.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 책의 의미에 제법 큰 상처를 줬을 것이다.
| | | 그람시 소개 | | | <그람시: 한 혁명가의 생애와 사상>(두레)에서 | | | |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사상가, 혁명가이기도 했지만 신문의 편집자·평론가로서 활약한 문필가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26년부터 죽음에 이르는 1935년까지 무솔리니의 탄압을 받고 감옥에 갇혀 오랜 수형생활을 했으며, 이런 고난 속에서 그의 사상을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는 3000장에 이르는 '옥중노트'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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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의 <옥중수고2>는 '지식인'의 역할을 깊게 다루고 있다. 사실 감옥에서 읽을 것과 쓸 것을 제한 받는 사람이 깊게 파고들 수 있는 내용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반성, 지식인의 역할이 아닐까? 그람시는
"자신의 직업적인 활동 이외의 부분에서 어떠한 형태로든지 지적인 활동"(18쪽)을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지식인으로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사회에서 '지식인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지식인은 지적인 활동과 다르다. 오히려 지식인은 '지배'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지배력을 장악하기 위해 나아가는 모든 집단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전통적 지식인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복하고 융합하기 위해 투쟁하는 점이다"(19쪽).
자연히 그람시의 관심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통적 지식인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인으로 향한다. 잘 알려진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개념이 그의 대안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유기적'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좀 애매하다. 그러다보니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개념도 단순히 '민중과 결합되어 지배계급의 세계관에 대항하는 지식인'으로 축소 해석된 감이 있다.
하지만 그람시가 얘기하는 '유기적 지식인'은 매우 적극적인 개념이다. 그는 단순히 '순진한 대중'들과의 연관성을 잃지 않을 것만이 아니라 대중 속으로 들어갈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과학적이고 올바르다'고 주장하고 지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대중의 '상식'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사고와 감정에서 시작할 것을 주장한다. 상식이 비판점이자 출발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상식'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모든 사람'이 철학자임을 밝혀내기 위해서 또한 상식에 기초를 두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170∼171쪽). 그리고 그람시의 지식인은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실천철학'을 실현하는 자들이다.
"그러자면 실천 철학은 철학사를 이끌어 온 지식인 중심의 철학을 비판해야만 할 것이다"(171쪽).
그렇다면 어떻게 대중 속에서 상식을 비판할 것인가? '이것이 올바르다'는 선언만으론 대중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대중은 한번의 설득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신념은 그람시가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으로
"대중 자체에게는 철학이 단지 신념으로서만 경험된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181쪽). 따라서 지식인은 '자신의 논지를 반복하는 데서 지칠 줄 몰라야' 하고 '대중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단기적인 선전·선동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런 종류의 대중적 창조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의적'으로 행해질 수많은 없다는 점이다. 즉 단순히 자신이 심취하고 있는 철학적·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혀 몰아붙이는 개인이나 집단의 형식적인 건설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183쪽).
단기적인 혁명관을 넘어 장기적인 진지전을 수행하는 방식 중 하나(가장 중요한 하나)는 '교육'이다. 그래서 < Prison Notebooks >의 편집자들은 지식인 다음에 교육에 대한 그람시의 글을 두었다.
그람시가 보기에 사회변화는 어떤 '문화적·사회적'인 통합의 달성을 전제하고 이런 통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교육이다.
"집단적으로 획득한 단일한 문화적 '풍토'…는 교육 원리와 그 실천에 대한 현대적인 고찰방식과도 연결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194쪽).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교사의 역할은 무엇이 진보적이고 무엇이 변화인가를 규정하는 그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런 진보와 변화는 한 개인이 규정할 수 있는 것,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를 위해 학교가 담당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분리되어 있는 생활과 학교를 연계시키는 것이다. 즉 교육체계의 메카니즘을 폭로하고 일상과 교육을 연계시키는 것이다.
"교육의 위기가 초래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러한 분위기와 생활방식이 퇴락하고, 학교가 생활로부터 유리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지 못한다면, 옛 제도의 교육과정과 훈련구조에 대한 비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는 학교에서 진실로 능동적인 학생의 참여라는 문제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그것은 학교가 생활과 연계를 맺을 때만이 가능하다. 새로운 교육과정이 명목상 학생의 활동과 교사와의 협동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것은 아동으로 하여금 더욱 더 수동적이 되도록 만드는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다"(50쪽). 사회를 바꾸지 않고 교육내용만 바꿔서 '참교육', '인간화교육'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 | | 헨리 지루 소개 | | | | 헨리 지루(Henry A. Giroux)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비평가 중의 한 사람으로 정치·사회·교육·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고 있다. 그의 저서 <교육이론과 저항>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이 있고,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비판교육자 혹은 저항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워터버리 석좌교수로 있으며, 주요 저서로 <디즈니 순수함과 거짓말>, <위기에 처한 교육>, <불온한 기쁨대중문화 익히기> 등이 있다.
옮긴이 이경숙은 경북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동아대학교와 경북전문대에서 교육학을 강의하고 있다. 교육문화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신문의 교육론 비판>(공저)을 썼고, 옮긴 책으로 <프레이리의 교사론>이 있다. / 소개글 인용 | | | | |
그람시의 생각은 지루에게로 이어진다. 지루는 '지식인'에 대한 그람시의 생각과 부르디외의 '장'개념, 프레이리의 비판교육학을 접목시킨다. "학교는 사회를 재생산하면서도 사회의 지배논리에 저항하는 공간"(42쪽)이고 "지배문화와 피지배문화가 얽혀 있는 사회적 장"(59쪽)이다. 지루는 교사가 '대항 헤게모니 교육'을 전개하고 사회 내부의 억압에 저항하게끔 하는 '변혁적 지식인'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교육은 교사의 지도가 아니라
"사회에서 비판적 행위자가 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사회적 기술을 학생에게 줌으로써 학생들이 권력을 갖고 변혁적 활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며, 학교 바깥의 또 다른 저항적 공공영역들과 연대해서 사회 내부의 억압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에 찬성하는 싸움을 하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의미이다"(42쪽).
이것을 위한 교사의 역할은 단순히 교원노조를 만드는데 그치지 않는다.
"학교 교육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교사들이 다른 교사들과 적극 연대해야지, 단순하게 교원노조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이 연대는 가르치는 활동과 함께 학교정책의 조직과 행정까지도 포함하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중심으로 개발되어야 한다"(63쪽). 이 연대에는 학교와 관련된 모든 구성원들, 교사만이 아니라 학부모, 학생, 행정직원들도 포함된다.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 모두가 변혁적 지식인이다. 이제까지의 교육운동은 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계를 가진다. 지루의 표현을 빌면, 이것은 학교를 지배논리를 재생산하는 곳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좌파 사상가와 좌파 교육자들이 비판의 언어를 넘어서지 못한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즉 여전히 진보교육자들이 학교를 지배적인 사회관계와 결부하는 비판 담론에만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학교는 국가를 위해 일하는 온순하고 말 잘 듣는 노동자를 찍어내는 사회적 재생산의 대리기구에 불과해진다. 교실에서 얻은 지식은 잘 짜여진 '허위의식'의 일부로, 교사들은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좌파의 입장은 좌파 교육자들이 학교를 위해서 이론화하는 프로그램적 언어를 개발하지 못했다는 데 약점이 있다. 대신 그들은 주로 학교에 대해서 이론화했고, 학교 안에서 새로운 공공영역을 구성하는 것에는 무관심했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한 '진보적 상상력의 구성물'을 제안하는 가능성의 언어가 그들의 담론에는 부족했다"(292쪽).
혼자서 모든 것을 떠맡으려니 자연히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학생들을 '당당한 주체'로 인정하고 함께 나간다면? 이제 교육의 과제는 단순한 비판에 머물지 않는다.
"문화정치로서 교육학은 비판교육자들에게 두 가지 과제를 던져 준다. 첫째, 교육자들은 어떻게 학교 내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 안에서 문화생산이 조직되는지 분석해야 한다. 둘째, 학교를 민주적인 공공영역으로 만드는 사회적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교육자들은 정치적 전략을 구성해야 한다"(205∼206쪽).
사실 지루는 그람시의 논리를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지루는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 개념을 비판한다. 그는 그람시에 대한 편향된 해석을 따라 유기적 지식인이 "노동계급을 유일한 변혁세력으로 보는 지식인에게만 적용"(279∼280쪽)된다로 해석한다. 반면 자신의 '변혁적 지식인'은 "그들의 사회형태를 만든 억압적 지식과 실천에 저항하는 집단이면 어떤 집단 출신이건, 어느 집단과 일하건 상관하지 않는다"(279쪽).
하지만 지루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지루가 '변혁적 지식인'이라는 개념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람시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학 내에서 '노동계급'을 팔아먹고 사는 소위 '진보적 지식인'이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지배문화의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학제도 안에서 벌어먹고 산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학생들에게 저항 담론과 비판적 사회실천을 제공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대학과 대학이 옹호하는 사회의 패권적 역할과는 맞지 않다. 많은 경우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런 모순에서 대학의 편에 서게 된다…진보적 사회이론은 단지 학술지와 학회의 상품이 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대학 자신이 자유주의적 다원론에 헌신한다는 증거로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던져주는 평생직장 아래서 그 지식인들은 편안한 자리를 누린다"(280쪽).
한국사회에도 이런 비판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학교라는 보호막 속에서 자신이 책임지지도 자신의 생활과 일치하지도 않는 '계급적인 발언'을 남발하는 것은 아닐까?
지루는 '변혁적 지식인'이라면 그 막을 찢고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추어들로 구성된 대중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전문적 의견의 이점을 공고히 하기 위한 학문적 준거, 즉 학술 출판물들은 대중들에게 다가가지 못한다…변혁적 지성인은 일반 대중을 위해 평론과 책을 쓴다는 생각을 정당화해야 하고, 비판의 언어와 함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가능성의 언어도 창조해야 한다. 이는 대중문화를 정치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283쪽). 이런 주장은 그람시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그람시와 지루는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핵심고리 중 하나를 '지식인'으로 봤다는 점, 교육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당시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논의를 반박하면서 단순한 비판을 넘어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한국사회에서 스승과 학생이 교육개혁과 사회변화의 '동등한 주체'라는 생각은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유교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곳의 대안학교에서 진행되는 실험은 '새로운 지식인'의 출현을 준비하고 있다. 더욱더 많은 대안들이 곳곳에서 '끈질긴 싸움'을 벌일 때 사회는 조금씩 변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