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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2년의 14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난 직후 부산의 한 여성 작가로부터 받은 전화는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지 선생님 사는 동네가 차암 멋진 동네네예."
충청도에서 유일하게 야당 후보를 당선시킨 지역에 대한 경탄의 표시였다. 그러나 나는 다소 과분한 심정이었다. 한영수씨의 당선은 그에 대한 동정심을 포함한 지역 정서와 관련하는 것이지, 이 지역이 특별히 야성이 강하다거나 수준 높은 시대 정신의 결집에 의해 결과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부산의 그 여성 작가를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자질을 알고 있는 그는 노무현이 고향에서 다시 고배를 마신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부산시민으로서 창피하다는 말을 했다.
우리 지역도 천박한 지역 정서에 충실한 충청도 지방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95년의 6.27지방선거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후 96년의 15대 국회의원 총선과 다음의 지방선거들에서 나타난 현상은 왜곡된 충청도 정서의 집단 최면적 위력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 준 것이었다.
그런데 96년의 총선에서는 특기할 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자민련의 싹쓸이에 저항하는 일이 홍성과 청양에서 일어났다. 홍성·청양선거구는 충청도에서 유일하게 자민련 후보가 패배한 곳이 되었다.
나는 한나라당 후보 이완구씨의 당선을 의미 있는 일로 보았다. 무리한 논법이긴 하지만 그것을 지역주의 극복의 단초와 실체로 보고자 했다. 그래서 과대 포장의 위험을 무릅쓰고 '홍성신문'과 '청양신문'에 지역주의의 벽을 극복한 홍성·청양 주민들을 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후 홍성의 이완구씨는 한나라당을 버리고 자민련에 입당을 했다. 결국 자민련은 선거 이후에도 충청도 싹쓸이를 달성한 셈이 되었고, 이완구씨는 벌써 그때부터 정치 철새의 소질과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 준 꼴이 되었다.
그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자민련 후보로 여유 있게 당선한 이완구씨는 자민련의 국회 요직까지 맡아 기염을 토하더니, 2002년에 이르러 정치 지형이 급박하게 바뀌자 순발력을 발휘하듯 잽싸게 자민련을 떠나 다시 한나라당으로 입당해 버렸다.
그런 시계추와도 같은 정치 철새의 '둥지' 꼴이 되어버린 홍성·청양 주민들의 지금 심정이 어떨지 나는 궁금하기도 하면서, 과거 홍성신문과 청양신문에 썼던 글과 관련하여 야릇한 미안함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지역의 또 하나인 이웃 동네인 당진 출신 송영진 의원도 내가 걱정스런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민주당 간판으로 2000년의 총선에서 자민련의 중진 김현욱씨를 제압함으로써 충청도 지역주의의 벽을 격파한 또 한 명의 패기 있는 정치 신인이 되었는데, 민주당 정권이 국정 운영의 난맥상을 보일 때 자민련에 대한 의원 꿔주기의 '희생양'이 되더니, 대선 후보 경선 때는 이인제씨를 맹종하는 행동으로 지역주의의 볼모가 된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후보단일화협의회'에 적극 가담하여 노무현 후보를 흔드는 일에 주력함으로써 저러다가 마침내 정치 철새의 대열에도 오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내게 안겨 주었었다. 물론 지금도 그 우려는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 이인제씨의 행동 반경을 주시하는 내 시야 속에서 송영진 의원, 그의 정체성은 아직 불명확하다.
이웃 동네들인 홍성의 이완구, 당진의 송영진 의원에 비해 우리 서산·태안 출신인 문석호 의원은 어떤가. 초지일관 민주당을 지키고 있는 그는 현재 바른 소망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큰 미더움을 주고 있다. 그는 신념과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일찍부터 정치판을 더럽히는 정치 철새들을 혐오하고 경멸해 왔다. 정치를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구차하게 철새 노릇까지 하면서 정치를 할 생각은 없노라는 공언을 한 적도 있다.
민주당의 대선후보 국민경선 과정에서 문 의원은 잠시 이인제씨를 쫓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있다. 청주 경선에서 이인제씨가 승리했을 때 당진의 송영진 의원과 함께 이인제씨의 손을 잡고 만세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면서 나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의 정치적 입지나 소신에 따라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고 추종하는 것까지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같은 충청도 출신 의원들끼리 지역주의로 단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큰 눈으로 볼 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더구나 이인제 의원의 자질이나 성향을 훤히 파악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의원이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정국의 진행 변수에 따라 민주당을 박차는 행동을 할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 의원이 지금은 이인제 경선 후보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최악의 경우에서도 끝까지 이 의원을 쫓지는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문석호 의원은 뜻 있는 지역 주민들의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민주당을 지키고 앉아서 공동 대변인의 자리에 오르더니 대선 국면의 한복판에 이르러서는 민주당 충청남도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맹활약을 하고 있다. 지난 6일 저녁에 텔레비전을 통해 그의 활동상을 보면서 나는 고맙고 흐뭇한 마음을 가졌다.
나는 문 의원이 계속적으로 초지일관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의 자질과 신념과 철학을 잘 알고 또 믿고 있는 나는 그가 어떤 정치 환경의 변화에도 정치 철새의 길을 걷지 않고 바른 길을 갈 것으로 믿고 또 바란다.
지난 8일 대전에 온 노무현 후보의 말 한마디가 지금 내 뇌리에 선명하게 매달려 있다. "충청도 인물도 좀 키우고"한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대뜸 문석호 의원을 떠올렸다. 문 의원은 키워야 할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정치 철새들과는 자질이 다른, 온전하고 깨끗한 큰그릇이 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인제 의원의 철새 행각과 관련하여 충청도 표심의 향방을 점치는 말들이 많다. 내 시각으로 볼 때는 충청도 인들을 모독하는 말이다. 충청도도 한때 어처구니없는 망국적 지역주의의 아성으로 전락한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지역보다도 앞서 깨어나고 있다. 충청도 사람들은 진정한 자존심이 무엇인지를 안다. 정치 철새 노릇을 반복하는 한 정치인의 행각과 지역주의를 쫓아 좌지우지되는 그런 중심 없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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