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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사단 73 연대 소총소대장 시절의 필자 (1970. 9)
26 사단 73 연대 소총소대장 시절의 필자 (1970. 9) ⓒ 박도
어느 날, 잠복초소 시범 교장을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쉬고 있는데 경북 안동군 와룡면 출신의 임 상병이 내 곁으로 와서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그는 고향에서 이발소를 하다가 입대한 소대원으로 서른이 넘었고 아이를 둘이나 뒀다.

그는 소대 내 최고령자로 별명이‘임 영감’으로 불려졌으며, 소대원 이발을 도맡았다. 대부분 이발사가 그러하듯 그도 걸쭉한 입심, 특히 Y담을 잘해서 삭막한 내무반에 활력을 주었다.

“웬 편지야?”
“꺼내 보십시오.”
인쇄물이 들었다. 펼쳐보니 부고장이었다. 돌아가신 이가 임씨가 아니었다.

“누구야?”
“장인어른입니더.”
“그래?”
“이런 경우 중대장님에게 상신하면 청원휴가가 될 깁니더.”
“나도 그건 알고 있어.”

중대 행정반으로 가기 전에 다시 펴 보았다. 우선 부고장이 인쇄된 게 의심이 갔다. 그 무렵 시골에서는 대체로 한지에 붓으로 부고장을 썼다. 다음으로 추석을 일주일 정도 앞둔 것도 꺼림칙했다. 하지만 문안에는 흠이 없었다. 봉투를 유심히 살폈다.

'1969. 9. 18. 안동 와룡' 우체국 소인도 뚜렷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부고장이 가짜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다. 곧장 임 상병을 부르려다 참았다. 일과를 끝내고 돌아온 임 상병을 불렀다.

“임 상병, 정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나?”
“네, 그 함자가 정말 제 장인어른입니더.”
“그럼 좋아. 근데 안동은 양반고장이지.”
“네, 그라믄요. 양반고장하믄 조선 팔도에서 안동만한 곳이 없을 깁니다.”
“그런 양반고장에서는 사람이 죽기도 전에도 부고장을 보내나?”
“그런 법은 없지요.”
“그런데, 임 상병 처갓집이 그랬는데.”
“예!? 그럴 리가!”

“자, 여기를 보라고. 부고장에 장인 돌아가신 날은 9월 20일, 발인 날은 9월 22일이지.”
“맞십니더.”
“그런데, 안동 와룡우체국 소인 날짜는 9월 18일이잖아. 군대에 오면 '마누라 빼놓고는 다 죽인다'라고 하더니….”

임 상병은 그제야 고개를 팍 숙였다.
“아이가 몇 살인가?”
“큰놈은 아들인데 세 살이고, 첫 휴가 가서 만든 둘째는 가시나인데 아직 얼굴도 못 봤십니더. 마누라 편지에 이제 막 기어 다닌다고 합디다. 마누라가 추석을 앞두고 그랬나 봅니더.”
“그렇게 보고 싶으면 면회 오라고 하지 그랬어.”
“우리 안동 와룡면은 촌이라서 여자들이 군부대 면회 오는 일은 없습니더. 암만 오고잡아도 시부모에 시할매까지 있는데 우째 말하고 나설 겁니까?”

1970년 겨울 소대원들과 함께 (앞열 좌에서 두번째가 필자, 세째열 첫번째 임영규 상병)
1970년 겨울 소대원들과 함께 (앞열 좌에서 두번째가 필자, 세째열 첫번째 임영규 상병) ⓒ 박도
나는 라이터를 꺼내 편지 봉투와 부고장에 불을 붙였다.
“임 상병, 이 부고장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 앞으로 열심히 근무하면 포상 휴가 내려올 때 선착으로 보내주겠다. 그만 가 봐.”
“공격! 돌아가겠습니더.”

그 날 밤, 내무반에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렸다.
“임 상병님, 좋다가 말았습니다. 어째 그렇게 군대는 늦게 왔습니까?”
“호적도 고쳐 보고 이리저리 피해도 안 되니까 안 왔나.”
“쇼를 하려면 좀 잘하지 그랬습니까?”

“거기까지는 마누라도 생각 못했을 기라. 야, 소대장이 말이야 ‘안동 양반동네는 초상도 안 났는데도 부고장 보내느냐’라는 그 말에는 가시개질하는 사람 치고 말 못하는 사람 없다카지마는 마 더 이상 할 말이 없더라.”

임 상병의 그 말에 내무반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임 영감님 아니 임영규 씨, 참 보고잡소. 나 옛날 소대장 박도입니다. 혹시 이 글 보시면 연락 한번 주세요. 019-9324-245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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