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4시경부터 쇼쿠안도오리 남대문시장 옆 닛폰렌트카 앞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쇼핑백에서 판넬사진을 커내며 이것저것을 상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4시 20분경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이자 판넬사진을 나눠주며 인도 한 쪽에 서기 시작했다. 일부 인원은 준비된 전단지를 들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전단지 배포를 하였다.
조용하던 일요일 오후의 거리는 역동적인 무엇인가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처음 촛불시위를 준비할 때만 해도 막막함이 앞을 막아섰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유학생이란 신분 자체가 남의 땅에 들어와 있는 이방인이란 증거가 아니겠는가.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평범한 유학생들이기에 어쩌면 커다란 벽과 부딪쳤을 때, 그 당혹스러움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이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커다란 용기가 앞서기 시작했다. 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조용하던 오후의 거리가 술렁이기 시작함에 따라 그 자신감은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4시30분이 넘어서면서 20명에 인원은 어느덧 50명 가까이에 인파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각자 알아서 스스로 판넬을 든 사람들 옆에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20분쯤이 지났을까.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인도로 늘어서 있었다.
초와 종이컵이 사람들에게 나눠졌다. 모두들 진지한 모습으로 초와 종이컵을 받아 들기 시작했다. 행렬 끝자락에서부터 불이 붙여졌다. 행렬을 따라 천천히 불이 옮겨갔다. 100개의 초에 불이 밝혀졌다.
이렇게 일본에서의 촛불 시위는 시작이 되었다. 시작을 알리는 말과 함께 행렬은 인도를 따라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리랑이 흘러 나왔다.거리행진을 하며 아침이슬, 아리랑, 광야에서를 불렀으며 소파개정, 부시 사과, 가해자 처벌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행렬은 신오오쿠보역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신오오쿠보역은 예전에 이수현씨가 선로위로 뛰어들어 의롭게 죽은 곳이기도 하다.
신오오쿠보역앞에서 구호와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일본어로 사건에 개요를 낭독하고 소파개정 및 부시의 공식 공개사과를 촉구했다. 행렬은 다시 인도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으며 처음 출발장소까지 이동을 하였다.
출발장소와 가까운 공원에 모여서 오늘 집회에 관한 의의를 설명하고 이번 사건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번 행사가 일회성이 아닌 부시의 공식 공개사과와 소파개정에 대한 약속이 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계속 진행할 것을 다짐했다.
일본에서의 첫 공식 촛불집회는 아리랑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미선·효순이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초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처음에는 분노의 물결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 안에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퍼져가고 있다.
오늘 초를 들고 있는 사람들에 모습 안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희망을 새기기 위해서 촛불 시위는 다음주에도 계속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12월 31일 2시 쇼쿠안도오리 남대문시장 옆 닛폰렌트카에서 2차 추모집회가 있을예정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