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유종호 교수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대학 2학년이던 1998년, 국문과에 개설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수업을 통해 유종호 교수를 만났다. 문학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던 당시의 필자에게 일생을 문학 연구에 바친 노 교수의 수업은 때때로 어렵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하였으나, 당시 그가 직필한 수업교재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남긴 인상만큼은 실로 대단했다.
이 책을 읽은 다수의 문학전공자들은 필자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리라 생각된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문학의 존재론과 가치론에 대해, 풍부한 설화와 원형을 들어 친절하게 설명한 그의 저작물은 으레 따분하게 여겨져야 할 중간/기말 시험 준비마저도 즐겁게 만들었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이렇게 저작물에 대해 받은 좋은 인상은 저자에게 그대로 투영되었다.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학문적 친절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진정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4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동아일보에서 '절반 개표, 고대 비극의 지혜'라는 제목이 달린 그 분의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유종호 교수에 대해 좋은 추억과 인상을 가지게 된 동기가 그의 글이었던 만큼, 오랜 시간 후에 만난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이 황당한 느낌은 실로 필자를 당혹케한다.
유종호 교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고대 그리스 비극을 원용한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에서 일어난 경연을 심사하는 방법으로 '절반개표'라는 방법을 이용했다는 내용이다.
'10명의 심사원이 경연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서 우수작가를 투표하고, 집정관은 10개의 표 가운데 아무렇게나 5개를 골라 우수작가를 선정한다. 이때 나머지 5표난 사표가 된다'는 것이다.
'절반 개표를 통해 우수작가를 선정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에게는 낯선 관행'이나, 이것은 <매수>로 드러나는 사전 부정을 방지할 수 있는데다 결과적 측면에서도 우승자로 하여금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게 하고 패자들을 과도한 열패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운'이 좋아 승리했던 월드컵 축구 경기로 연결되면서 '패자 앞에서의 동물적 환희는 치사스럽게 느껴진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필자가 4년 전 유종호 교수의 글을 높이 평가했던 이유는, 문학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웠던 이에게도 너무나 명료하고 깔끔하게 '문학의 존재론'이라는 추상적 소재를 전달할 수 있었던 그의 학문적 능력 때문이었다.
지금 이 글은? 수 차례를 읽어봐도 도대체 '왜 이런 글을 썼는지'이해를 못하겠다. 모름지기 신문에 실리는 칼럼은 문학과는 달리 '필자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며 그것에 근거를 보태 독자를 설득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에 충실하여야 할텐데, 그의 글은 이러한 기능과 동떨어진 듯이 보이고, 더욱이 이것을 유종호 교수가 모를 리가 없다는 점이 당혹스럽다.
좀 더 솔직하게 풀어 말하자면, '명시적으로는'알지 못하겠지만 비극의 원용 뒤에 숨겨진 의도를 '짐작할 수는' 있겠다는 것이 필자가 느낀 당혹감의 근거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이번 유 교수의 글은 지나간 대선을 연상케 한다. 16대 대선은 57만여표라는 1, 2위간 후보의 표차가 지난 15대 대선에 비해 더 벌어지긴 했지만 선거가 양강 구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근소했다고 볼 수 있다.
이회창 후보는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했지만, 그의 일부 지지자들은 대선 개표에 최초로 도입된 전자개표기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다시 손으로 재검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나라당 역시 이러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현재 대법원에 '당선 무효소송'을 제기한 상태이다.
글의 말미의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에서 '다른 분야'란 이 대선을 말함이 아닐까?
유 교수는 '표차가 이렇듯 근소하였기에', 고대 그리스 식으로 유효투표의 절반만 임의적으로 선정해 개표하였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 했다면 이길 수도 있었던 패자 앞에서 지나치게 환희하는 모습을 보이는 노 당선자의 주변 세력과 지지자들에게서 꼴불견스러움을 느꼈던 것일까? 보기 역겨우니 좀 자제하라는 말인가?
'오이디푸스왕'을 언급한 부분은 더 가관이다. 그의 비극적 결함은 '모든 것을 다 알아내려는 의지'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절반 개표'는 미지의 부분이 수두룩한 인간사를 함의하고 있기에 합리적이라는데, 그렇다면 지금 대선에서 유효투표 모두를 개표하고 그것을 통해 당선자와 패배자를 가려낸 것이 '오이디푸스식'의 비극을 초래하기라도 한다는 이야기인가? 이긴 쪽과 진 쪽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민주주의식 선거 개표의 원리가 '미지의 인간사'를 제대로 함의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필자의 해석이 너무 나아간 것이라면 유 교수께 사과의 말씀을 드릴 용의도 있다. 학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기에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러나 모든 글, 그 중에서도 신문에 실리는 글이 발생 시기의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유 교수의 이번 글은 위와 같은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했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도대체 이 칼럼을 왜 쓰신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필자는 신문의 필자 위촉진들이 학계의 명망 있는 원로급 교수들에게는 칼럼을 위촉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이런 실망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실망스러움을 표출하지 않을 수 없고 그 표출 과정에서 존경하던 분을 스스로 욕보이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 [월요포럼]유종호/절반 개표, 고대비극의 지혜
“숫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최고다.” “세상에 경이는 많다. 그러나 가장 찬란한 경이는 인간이다.” 모두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나오는 합창대의 대사다. 인간사치고 고대 그리스 비극이 건드리지 않은 구석은 없다.
3대 비극시인이라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약 300편의 비극을 썼으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33편에 불과하다. 그 밖에도 이름이 전해오는 비극시인의 수는 150여명이나 된다. 이들의 작품은 단 한 편도 남아있지 않다.
▼10표중 5표만 열어 승자결정▼
고대 그리스 비극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디오니소스 축제의 일환으로 발전한 것이다. 3월 말 포도주와 도취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가 열렸다. 제물을 바치고 국가 유공자를 칭송하고 전사자의 아들 중 성년에 도달한 청년들의 무장 행렬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주요한 행사는 비극의 경연(競演)이었다. 하루에 한 작가의 비극 3편과 가벼운 소극(笑劇) 한 편을 상연했고 그것이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비극은 아크로폴리스 남쪽의 야외극장에서 상연되었다. 관객석의 수용 인원은 1만4000명을 웃돈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때는 무료로 상연되었고 한때는 입장료를 받았으며 심지어 관람객에게 상여금을 주는 시기도 있는 등 변화를 겪었다. 극장이 국가의 교육기관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해마다 새 작품만을 상연했고, 아테네의 쇠퇴를 초래한 근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도 경연이 중단되는 법은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경연인 만큼 심사원이 필요했다. 10개 부족이 각각 약간 명의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면 그 명찰을 10개의 항아리 속에 밀폐해 아크로폴리스에 보관한다. 경연이 시작되면 그 항아리를 극장으로 운반하고 비극 상연을 감독하는 집정관이 그 10개의 항아리에서 명찰 하나씩을 무작위로 끄집어낸다. 이렇게 선발된 10명의 심사원이 경연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서 우수작가를 투표한다. 그러면 집정관은 다시 이 가운데 아무렇게나 5표를 골라 우수작가를 선정한다. 나머지 5표는 사표(死票)가 된다.
절반 개표로 최다 득표자를 가려 우승자를 결정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에겐 낯선 관행이다. 따라서 많은 연구자들이 그 이유를 추측하는 가설을 내놓았다. 현재로선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는 추측이 우세한 것 같다. 10표를 모두 개표할 경우 6명만 매수하면 우승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5표를 개표할 경우 8명을 매수해야 하니 그만큼 부정행위는 어려워진다. 또 10표를 모두 개표하면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관계자가 알 수도 있다. 그러면 협박 등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우리는 그 진상을 알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를 통해 그 이유를 추측할 수도 있다. 절반 개표에 의한 판정은 선정의 우연성을 부각시킨다. 또 판정의 오류 가능성과 자의성을 돋보이게 한다. 10표 전체의 개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승자는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며 과도한 오만이나 자만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패자들 역시 과도한 열패감이나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패자에게는 위로를 안겨주고 승자에게는 겸손의 필요를 알려준다.
그리스 비극의 전범인 ‘오이디푸스왕’에서 주인공의 비극적 결함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알아내려는 고집불통의 의지였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대한 잠재적 침범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휴브리스’라 불렀다. 미지의 부분이 수두룩한 것이 인간사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는 절반 개표는 비극 판정에 어울리는 ‘비극적 지혜’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오만 경계한 관행▼
‘우연은 운명의 논리’라는 말이 있지만 경기의 승부가 운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월드컵 때 실감했다. 경기를 줄곧 리드하고도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올림픽 경기 같은 때 권투나 레슬링 승자가 껑충껑충 뛰면서 링을 몇 바퀴 도는 것을 볼 때마다 그리스 비극의 판정 관행을 떠올리게 된다. 패자 앞에서 보이는 그 막무가내의 동물적 희열은 자연스럽기보다는 치사하다는 느낌을 준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유종호 연세대 특임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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