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백문일 특파원) 미 뉴욕타임스는 지난 26일 윌리엄 사파이어의 칼럼 '북한은 중국의 아이'(North Korea: China’s Child)에서 "주한미군이 한국의 비무장지대에서 인질로 잡히지 않는다면 미국은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북한의 핵 시설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며 주한 미군의 철수를 주장했다.
사파이어는 지난 20년간 뉴욕타임스에 1주일에 두 차례씩 칼럼을 써온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로, 그만의 독특한 논평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미 정치와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파이어는 이 칼럼에서 북한으로부터 제기되는 테러의 위협을 차단하려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 첫 번째 조치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지난 50년간 자유를 지켜온 것과 관련, 주한미군에 빚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며, 최근 한국 대통령선거에서는 미국이 북한에 굴복한 '아무 쓸모 없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후보(盧武鉉)를 대통령으로 뽑았다고 말했다.
사파이어는 이어 "미국은 제국주의적인 강대국이 아니며 미국을 원치 않는 국가에는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는다."고 주한미군 철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파이어는 주한미군은 북한군의 침공 저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군이 북한의 침공을 격퇴할 수 있도록 즉각 지원하기 위해 배치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 안보의 최우선은 핵미사일로부터 본토를 지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주한미군이 북한의 반격으로 DMZ에서 인질로 잡힐 수 있다는 우려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북한의 '위험한' 핵 시설들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번역기사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해서도 문제지만, 차라리 번역만 했으면 될 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한 것이 문제다. 백 기자가 번역에 머무르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가미한 유일한 문장이 다음 내용이다.
"지난 20년간 뉴욕타임스에 1주일에 두 차례씩 칼럼을 써온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로, 그만의 독특한 논평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미 정치와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파이어가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라니
참으로 기가 찬 소개 글이다. 윌리엄 사파이어를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로 소개했다. 도대체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로 사파이어를 소개할 정도라면 차라리 백 기자는 미국으로 '귀화'해서 공화당에 입당하고 '매파' 또는 '강경파'에 줄서기를 해야 한다. 이들 외에는 사파이어를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라고 분류하는 사람은 미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미국 사람도 아닌 한국인이 그것도 <대한매일>의 기자가 사파이어를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라고 지칭하다니...
한국을 제외하고(!) 대체로 정당은 특정 이념을 중심으로 모인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정당 내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기 마련이다. 미국의 공화당도 그렇다. 소위 말해서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 류의 '정통보수주의'가 온건파이며, 미 국방장관 럼즈펠드나 국방부(副)장관 울포위츠 류의 '신보수주의'가 강경파이다. 윌리엄 사파이어는 바로 '신보수주의'의 대표적인 칼럼니스트이다.
소위 말하는 정통보수주의는 ① 국가개입최소화 ② 개인자유 극대화 ③ 반공지상주의 ④ 작은 정부 ⑤소극적 국제 개입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이에 반해 신보수주의는 정통보수주의의 ①②③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④의 작은정부보다는 큰 정부 ⑤의 소극적 국제개입주의보다는 적극적 개입을 주창한다.
특히 신보수주의는 '중동문제'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데, 무조건적인 이스라엘 지지를 주창하는 특징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라크의 정권 교체'를 부르짖으며 대 이라크 전쟁을 강력히 옹호하고 있으며, MD구축을 위한 여론전의 첨병 노릇을 했으며, 각종 군비축소조약에서 미국의 탈퇴를 종용해왔다. 이 무리 중 가장 앞자리에 사파이어가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클린턴이 하면 스캔들
사실상 사파이어의 칼럼을 보면 우리나라의 C일보의 칼럼니스트 김모씨와 참으로 닮았다. 올해 사파이어의 나이가 만 72세이면 아마 김모씨가 가장 존경하는 칼럼니스트가 사파이어쯤 되나 보다. 왜냐하면 그의 극우적, 좌충우돌식 칼럼이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클린턴 대통령은 군사적 공격이 정치적 동기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인지 경제적 제재만으로 충분한지를 자신에게 물어보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는 그보다는 의회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보브 돌 공화당 대선 후보자에게 전화를 해서 돌과 의회지도자들 모두에게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증거에 대해 입증해야 한다. (1996년 10월 16일, NYT)
위의 내용은 1996년 클린턴과 보브 돌이 12월 대선을 앞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을 때, 클린턴이 이란과 전쟁을 생각할 때 이에 반대하는 사파이어가 쓴 칼럼이다. 사파이어는 철저하게 공화당 매파의 입장을 대변해왔고, 클린턴 집권 내내 클린턴에게 직설적이고 독설적인 비판을 해온 장본인이다. 그래서 클린턴이 대통령선거에 전쟁을 이용하려는 기도를 공격하면서 '확고한 증거와 입증'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 표적을 축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빈 라덴은 그 도발적인 TV 메시지에서 밝혀주었다. 그는 자신의 동맹인 사담 후세인이 권좌에 있는 동안 미국인들은 "안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고통받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도 똑같이 가차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빈 라덴과 똑같은 적을 상대하는 똑같은 싸움이다.(2001년 10월 8일 NYT)
2001년 9.11사건이 터진 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9.11사건'을 테러라고 규정하고 이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밝혔었다. 여전히 당시까지 그 어떤 확고한 증거와 입증이 없었던 라덴이 후세인을 언급했다는 것만 가지고 사파이어는 이라크까지 공격해야 함을 계속 주장했다. 이란 공격설을 흘린 클린턴을 향해서 주장한 '확고한 증거와 입증'은 없는 것이다. 민주당 대통령 클린턴이 하려고 하면 '확고한 증거와 입증'이 필요하지만, 자기 편인 공화당의 부시가 하려면 '증거와 입증을 못해도' 봐준다. 아니 자기가 나서서 부추긴다. 사파이어는 닉슨의 공화당 행정부에서 한 자리했던 사람이다.
인종갈등까지 조장하고
2000년 엘 고어가 부시에게 억울한 패배를 당하게 민주당의 잭슨 목사 등이 재검표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사파이어는 공화당 부시의 당선 의미를 훼손하는 흑인 목사 잭슨과 흑인들이 상당히 기분 나빴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흑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획일적인 투표 성향을 보여주었다. 공화당은 이 문제에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있고, 민주당은 그런 흑인들의 표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균열을 좁히기 위해서는 양편의 힘이 모두 필요하다. 이제는 흑인들이 공화당에 파고 들어가 안에서부터 길을 만들어 나와야 한다.(200년 12월 18일 NYT)
우리에게는 사파이어의 이런 주장이 상당히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호남지역을 은근히 공격하면서 '몰표 양상'을 비판하던 C일보와 C일보의 대표선수들이 숱하게 주장해온 내용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들을 어떻게 도와주었는데…
사파이어는 유럽이든 아랍이든 한국이든 미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지 않은 나라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 국가들이 미국을 비판하면 참지 못하고 '우리가 그렇게 자기들을 도와주었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나'며 분통을 터뜨린다.
(유엔 인권위원회 위원 탈락 및 국제마약통제위원회 부위원장 선거에서 미국인 탈락 후) 미국을 지지하기로 했다가 막판에 등을 돌린 14개국이 어느 나라인지를 국무부. 중앙정보국(CIA)이 찾아내 응징해야 한다. 중국과의 무역이나 아랍석유 구입 특혜 또는 안전보장이사회의 표에 팔려 미국의 등을 찌른 국가를 반드시 색출해야 한다.(2001년 5월 7일 NYT)
참으로 무섭다. 유엔의 각 기구 선거에서 미국인이 낙선하면 '국무부'와 CIA의 조사를 받아야 하고, 응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니. 미국인이 출마하는 모든 선거에서 한국은 무조건 미국을 지지해야 할 것 같다. 조사와 응징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전세계에 주권국가는 오로지 미국만 있다는 사고방식에 출발하는 사파이어의 사고가 <뉴욕타임스>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리고 이런 사파이어의 논리가 현재 미국의 공화당 부시정권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연실색할 뿐이다.
무슬림의 세례를 받은 완고한 테러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를 비난하는데 주저하는 이슬람 성직자와 우리의 도움과 보호를 미국에 대한 증오를 부채질하는 광신자를 용서하는 것으로 되돌려준 아랍의 지도자에게도 분노한다.(2001년 10월 13일 NYT)
'우리의 도움과 보호를' 받고 있는 작자들이 우리에게 공격하는 자들을 옹호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린다. 증거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 그런 태도가 일단 기분 나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1년 1월 유럽연합이 미군이 포함되어 있는 나토(NATO)보다 유럽연합의 독자적 군대인 '유럽신속대응군(ERRF)'을 지지하면서 미국을 배제시키려는 의도를 보이자 사파이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핵우산을 포함한 미국의 힘은 유럽동맹국을 보호하기 위해 전 대서양으로 확대됐으며…이라크, 이란과…테러단체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이 구축하려는 미사일 방어체제는 유럽동맹국의 지지를 받아야 하며, 반대로 또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따라서 국가미사일방어체제에만 한정해서는 안된다.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협박을 받고 있는 동맹국 보호까지 개념을 확장한 연합미사일 방어체제, 즉 AMD(Allied Missile Defense)를 구축·시험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돈이 소요될 것은 틀림없고, 따라서 초강대국만이 감당할 수 있다.(2001년 1월 25일 NYT)
초강대국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을 '보호받아야 할' 유럽연합 따위가 어떻게 독자주의를 운운할 수 있는가 하며 사파이어는 분통을 터뜨린다. 이런 분통은 어이없게 노무현을 향한다.
한국이 지난 50년간 자유를 지켜온 것과 관련, 주한미군에 빚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며, 최근 한국 대통령선거에서는 미국이 북한에 굴복한 '아무 쓸모 없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후보(盧武鉉)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주한미군에 빚을 지고 있는 한국인들이 주한미군 주둔에 불만을 표시하고, 노무현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다니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들이 어디 있는가하며 사파이어는 한국을 향해 심한 배신감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매일, 그리고 한국 언론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사파이어
사파이어를 주로 인용하거나 그의 칼럼을 그대로 번역해서 보도하는 대표적인 신문이 <문화일보>와 <동아일보>다. 그리고 사설이나 칼럼에서 특히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에서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뜬금 없이 <대한매일>이 사파이어의 칼럼을 완역한 것도 아니고, 애매한 번역에서 사파이어를 띄위주는 듯한 기사를 왜 실었을까. 그 의도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미국의 수많은 칼럼니스트가 있고, 그 대부분이 대화로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몇몇 신보수주의적 칼럼니스트들이 강경 대응을 주문해 왔고, 한국의 <조선일보>가 이들의 주장을 '바이블'로 삼아 남한 내 보수강경파들을 선동해 왔다.
그런데 백 기자의 <대한매일>이 아무런 설명 없이 이 칼럼을 번역했다. 대한매일은 왜 이런 기사를 지면에 반영했을까. 사파이어의 주장처럼, "한국이 지난 50년간 주한미군에 빚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며, 최근 한국 대통령선거에서는 미국이 북한에 굴복한 '아무 쓸모 없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후보(盧武鉉)를 대통령으로 뽑았다고 말했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 왈, 스스로의 요구에 의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31일 '주한미군은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위해 미국 스스로의 요구에 의해 와 있지만 동시에 주한미군은 우리의 안보에 도움이 되고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서 "미국과 우리는 서로 이익이 되는 관계"라고 강조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스스로의 요구에 의해' 주한미군이 한국에 오게 된 것을 밝혔다. 그리고 '주한미군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파이어의 주장에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즉 '미국과 우리는 서로 이익이 되는 관계'로 주한미군을 봐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또 사파이어의 주장대로, "바로 요크셔 북부지방의 미사일 기지인 파일링데일스에서 양떼들 사이에 미국의 레이더 기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만약 확대된다면 이 기지는 북아메리카를 목표로 한 미사일을 추적, 요격하는데 긴요한 전초기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2001년 1월 25일 NYT)" 하며 유럽 주둔 미군은 미국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고, 한국 주둔 미군은 미국의 이해 관계 없이 일방적으로 한국의 안전만을 위해서 주둔하고 있다는 것인가. 결코 아님을 우리는 안다. 한반도가 왜 전략적 요충지라고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만 있으면 미군의 주둔은 미국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대한매일>에게 정말 묻고 싶다. 특히 백 기자의 반론을 기대한다. 무지한 것인가,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