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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왜 이 세상을 둥글게 만들면서도 아기자기하게 만드셨을까? 왜 세상에, 사람들에게 수만 가지 구분을 주셨을까? 계절, 기후, 풍토, 인종, 민족, 언어, 종교 등등 그 수만 가지 다양한 구분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일까?
세상의 그 다양한 구분은 일단 차별과 대립의 조건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극복과 조화의 토대가 된다. 여기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분별의 지혜다. 그것은 차별과 대립의 조건에서부터 발원하고, 극복과 조화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
극복과 조화 자체가 인간 지혜의 결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한 의지와 사랑이 기본이 될 때 인간의 지혜는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아기자기 알록달록한 상태이되 둥글게 만들어진 이 세상은 스스로 돌고 돌아 억겁의 시간을 쌓고 인간 세상에도 장구한 시간이 주어졌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세상의 갖가지 구분들은 여전하다. 어쩌면 그 구분이야말로 이 세상의 '운동성' 자체일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존재하되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그 구분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우리에게도 차별과 대립의 조건은 여전하고 또 심대하다. 그것은 먼 훗날에도 계속적으로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지속되는 것임으로써, 신이 인간을 하늘나라로 불러 올리는 '시험장'으로 계속 존재한다.
이 세상의 다양한 구분은 인간 지혜의 시험장이다. 인간의 선한 의지와 사랑이 꽃피어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다양한 구분―차별과 대립의 조건은 분별과 극복과 조화의 명제를 끊임없이 생성시키며 생명력을 지속해 간다.
이 세상의 수만 가지 다양한 순환적 구분으로부터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다면, 차별과 대립의 조건에서 우리는 극복과 조화의 명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 명제는 우선적으로 '상생(相生)'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 세상의 온갖 존재물이 자신의 특성과 본분을 잘 지니고 서로 껴잡거나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이좋게 어울리는 모양새가 조화의 실체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로부터 가능하다. 실은 그것을 위해 인류는 온갖 고통과 악조건 속에서도 선한 의지와 지혜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며 살아왔다고도 볼 수 있다.
조화의 세계는 다른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습성으로는 이룩되지 않는다. 배타성이나 배척이 경우에 따라서는 미덕이 될 수도 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자신을 부각시키고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이기적 배타성일 경우에는 파괴성을 수반하기 십상이다. 일단 파괴성을 지니게 되면 거기에서는 인간의 선의적인 지혜와 사랑은 실종되고 만다. 자신을 크게 부각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인간의 최대 덕목이요, 최고 가치인 사랑을 상실해 버린 상황을 맞는다면, 거기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싸우고 파괴하고 무찌르고 이긴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나만이 존재할 수는 없다. 내 것만이 전부일 수도 없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가능치도 않고 온당치도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무한한 사랑의 가치와 실체를 제시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 사랑으로 구원의 길을 놓기 위해서였다. 사랑으로 구원의 길을 놓기 위해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길을 밟아 가는 일에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 속에 자기 희생과 죽음(순교)은 포함되지만, 이 세상에서 남은 쳐부수고 제압하고 다른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화합과 조화를 추구하는 노력은 사랑에 포함되지만, 나와 다른 것은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하고 싸우는 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 인간의 지고한 선의와 지혜에 의해서 생겨나고 발전하고 존재하는 종교, 심오한 가르침과 긴 역사와 수많은 미덕들을 지닌 종교를 내 종교 내 관점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부정하고 배척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스르고 파괴하는 짓이다.
이런 논법에 많은 항의들이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반론이나 항의들에 반드시 인용되는 말씀들이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말씀들은 앞서 소개했으므로 생략하고, 신약성서에 있는 말씀들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복음 14장 6절, 공동번역)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공동번역)
위에 적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고, 아래에 적은 말은 예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한 말이다. 성서에 명확히 기록된 이 말씀들은 거룩한 진리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믿어야 할 사항이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대략 두 가지의 태도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오로지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태도이고, 또 하나는 사유적이고 탄력적으로 폭넓게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이 말씀들을 오로지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그런 경우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으로 그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았던 사람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서 살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되고 만다.
성서를 오로지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불리를 입은 그 무수한 사람들의 억울한 처지를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모조리 구원받지 못했고 못한다는 단정에 쉽게 함몰해 버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시고 모범을 보여 주신 사랑의 범주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 구원이라는 것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태어나 살았던 사람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이나 상황 속에서 살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의문과 우리는 당연히 만나야 한다.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단정에 쉽게 안주해 버리지 말고, 당연한 의문을 끌어안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고 구세주이시라면, 강생 이후의 인간 구원만을 목적하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닐 터이다. 그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강생 이전의 영혼들까지 관장하시는 분일 것이다.
하느님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강생 이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강생 이전의 무수한 영혼들까지 관장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라면,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미치지 않은 곳이나 상황 속에서 산 사람들의 영혼까지 관장하신다는 결론에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절대적인 악인이 아닌 이상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은 여러 가지 형태로, 죽은 다음에라도 연결이 되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쳐 십자가상에서 죽은 것은, 그 속죄의 피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 선택적으로 일부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연유하는 내 믿음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내 믿음의 보상(報償)은 나 개인에게만 귀착되는 것도 아닐 터이다. 내 믿음의 보상을 나는 하느님을 몰랐고 믿지 않았던 내 조상들의 영혼과도 나눌 수 있을 것이며, 내가 하늘에 쌓는 선업은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승에서 아무런 인연도 없었고 전혀 몰랐던 사람과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과 믿음으로 위에 소개한 성서 말씀들을 다시 읽는다면,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나를 닮지 않고서는, 나를 본받지 않고서는"이라는 뜻과 함께 더 많은 뜻을 곁들여 헤아릴 수 있고,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라고 한 베드로 사도의 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가장 크게 힘입었던 숱한 순교자들의 피도 떠올릴 수 있다.
온갖 고문과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죽음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구원의 길이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게도 되지만,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고 선의 근원이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생각하면 더 큰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된다. 신앙 박해가 없는 오늘을 사는 내가 순교자들을 닮을 수 있는 길은 스스로 나를(모든 이기심과 욕망과 아집)을 죽이며 참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일뿐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으려면 그분을 본받고 닮으려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시고 모범을 보여 주신 사랑의 실체와 범주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그런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물을 본다면 나는 좀더 겸손과 겸허를 지닐 수 있고, 남을 더욱 존경할 수도 있고,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에 대해서도 애정을 가지고 존중의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을 때 나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눈도 더욱 커지고, 불의와 부당함에 대한 의로운 분노도 일으킬 수 있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깊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 삶 안에서 자연스럽게 행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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