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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새해 첫 편지에는 '두 가지 본성만 잘 다스린다면 꽤 괜찮은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이 써있었다. 그 선배는 우리 안에 있는 잔인해지려는 본성과 게을러지려는 본성을 이야기하며, 게으름을 경계하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영화는 인간의 미친 짓과 잔인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정말 뼈 속까지 스며들게 보여주고 있었다. 맨 손의 인간은 너무도 약해 목숨을 이어간다는 것 자체가 그저 기적일 뿐이었다.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살고 있던 유태인 피아니스트 블라덱 스필만과 그 가족들은, 독일군에게 내몰려 유태인 집단 거주 지역인 게토를 거쳐 수용소로 향한다.

수용소행 기차에 타기 전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블라덱은 그 처절한 죽음과 공포의 현장에서 홀로 목숨을 이어나간다. 그러던 중 독일 장교에게 들키고, 블라덱은 그 장교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된다.

블라덱이 홀로 남겨지기 전까지 영화는 그의 가족들을 함께 보여준다. 아버지와 어머니, 2남 2녀의 자녀들. 블라덱은 그 집의 큰 아들이다. 넉넉하고 따뜻해 보이는 가정. 그러나 시시각각 유태인에 대한 탄압은 심해지고 식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불안하다. 아버지 역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럽다.

아버지는 유태인 표시인 푸른 별을 그린 완장을 차고 나갔다가 길에서 새파란 독일군에게 뺨을 맞고, 인도로 걷지도 못하게 해 구정물이 질척이는 도랑으로 내려선다. 그래도 집에 돌아와 식구들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유태인이 소지할 수 있는 돈의 액수마저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생활비가 떨어져 눈물 흘리는 아내. 아버지는 그 옆에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한다. 눈 앞에서 아들이 독일군에게 뺨을 맞고, 자식 두 명과 강제로 헤어지게 돼도 아무 말 할 수 없다.

결국 아버지는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타고, 아들은 타지 않는다. 아들과 헤어지면서 아버지는 먼 훗 날 그 아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 꿈에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아니면 혹시 기차에 타지 못한 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을까.

한 집안의 가장, 한 가정의 기둥인 아버지는 이 미친 세상에서 가족들을 지킬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를 써도 그 일은 불가능했다. 늙은 아버지는 가족들의 고통과 공포를 함께 겪으며 정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으리라.

강제로 떨어져야 했던 두 자녀가 나머지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오게 돼 식구들이 함께 모이지만, 철조망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식구들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주머니를 뒤지게 해 남은 돈을 모아 캐러멜을 한 개 산다. 그리고는 주머니 칼로 여섯 조각을 낸다. 손톱보다 작은 캐러멜 조각이 식구들의 입으로 하나씩 들어간다. 정말 그래서 함께 끼니를 나눈다는 '식구(食口)'인가….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던가. 자식들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캐러멜 조각을 나눠주는 그런 존재였던가. 일제 시대와 6·25 전쟁만이 아니라 그 후의 시간도 모두 전쟁처럼 살아오신 나의 81세 아버지는 어떻게 그 어려운 시절을 헤쳐나오셨을까에 생각이 미친다.

헤어져 다시는 못만난 가족들이지만 블라덱의 남은 인생에서 식구들은, 또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그를 만들어 갔을까. 블라덱의 인생 저 뒤 편에서 나는 그의 아버지를 보았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보았다.

덧붙이는 글 | (피아니스트 The Pianist / 감독 로만 폴란스키 / 출연 애드리언 브로디, 토마스 크레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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