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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수천>을 위해 뭉친 386 문화전사들. 좌로부터 안치환, 신동호, 김정환, 윤민석.
뮤지컬 <수천>을 위해 뭉친 386 문화전사들. 좌로부터 안치환, 신동호, 김정환, 윤민석.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먼저 공연연출가 김정환(37)이 들려주는 그 옛날(?) 이야기 하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연세대에서 박살이 났던 96년 초가을이었죠. 이대로 가다가는 학생운동의 정통성과 도덕성, 역사성이 모조리 도매금으로 매도된다는 위기감이 왔어요. 당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한총련의 전신)동우회 회장이었던 이인영(전대협 1기 의장) 선배와 신동호(시인·38)를 만나 '문화행사라도 하나 해서 후배들에게 힘을 주자'고 뜻을 모았지요.

경희대에서 노래와 연극 등이 어우러지는 공연을 열기로 하고 연습에 들어갔는데, 막상 당일엔 공연이 원천봉쇄된 겁니다. 최종 리허설을 하려고 음악만 틀면 교문 너머로 지랄탄(최루탄의 일종)을 정신없이 쏘아대는 겁니다. 학교 주변엔 전경과 닭장차(전경버스)가 구름떼처럼 깔리고 관객은 물론, 스텝들도 학교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이러다간 준비한 거 몽땅 폐기하겠다싶어 고육지책으로 해가 질 때쯤 교문 앞에다 조잡한 스피커와 마이크를 설치하고 게릴라식으로 공연을 열었어요. 그때 사회를 본 사람이 오영식(전대협 2기 의장)과 최광기씨에요.

그런데, 정태춘과 안치환, 조국과청춘(서총련 노래패)의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세 겹 네 겹으로 둘러친 전경들의 벽을 뚫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예요. 회사를 마친 30대 넥타이부대들도 '평화공연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우릴 거들어 주더군요. '그날이 오면'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너나 없이 하나가 됐던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마치 제2의 6월항쟁 같았거든요."

우여곡절 끝에 공연을 끝낸 불온한 행사(?)의 주역들은 그날 밤 한 가지 약속을 한다. "좋은 날이 오면 꼭 합법적인 장소에서 합법적인 사람들을 모아 합법적인 공연을 열자. 오늘처럼 최루탄에 눈물 흘리지 말고 웃으며 함께 하자." 그들이 손가락 걸어 다짐했던 그 '약속'이 마침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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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월 23일부터 26일까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될 고구려 뮤지컬 <대륙의 여인 수천(守天)>을 위해 그날의 주역,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뭉친 것이다. '땅은 스스로 경계를 긋지 않는다'는 고구려인의 담대한 기상을 담은 뮤지컬 <수천>을 위해 모인 '386 문화전사들'의 면면은 다채롭고, 화려하다.

386 문화전사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고구려인의 웅대한 기상을 복원하는 뮤지컬 <수천>
고구려인의 웅대한 기상을 복원하는 뮤지컬 <수천> ⓒ 가극단 금강
<겨울경춘선>의 작가 신동호가 대본을 썼고, 그날 '광야에서'를 목 메이게 불렀던 안치환(38)은 '전대협진군가'와 '퍼킹 유에스에이'를 작곡한 윤민석(39)과 호흡을 맞춰 아름다운 아리아와 웅장한 코러스를 만들어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감독한 이상인(38·용인대 영화과 교수)은 기꺼이 <수천>에 사용될 영상을 제작해주었고, 임수경은 홍보대사가 되기로 약속했다.

연출은 당연지사 김정환. 노태우 정권시절 학생운동에 연루돼 보안사령부에 의해 산채로 야산에 묻힐 뻔했던(세칭, 보안사 생매장 사건) 고통을 겪었음에도 신념을 꺾지 않고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등 재야단체의 문화공연을 10년 이상 노 개런티로 연출했고, 2001년과 2002년 '8.15 민족공동행사 남북예술단 합동공연'을 연출한 김정환의 올곧음과 초지일관을 알고있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사장 김윤수)은 <수천>을 '2003년 남북문화교류 공연작'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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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수천>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있는 작품일까? "불행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은 정환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슴 웅크리고 사는 우리 민족에게 고구려인의 웅대한 기상을 돌려주기 위해서" 대본을 썼다는 신동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민족의 환타지를 찾고싶었어요. 유대민족의 환타지가 <구약성서>라면, '대지 위에 경계는 없다'는 고구려인의 크낙한 마음은 한민족의 환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막무가내로 유입된 서구사상으로 인해 속물화된 사람들에게 '정복'이 아닌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호태왕(광개토대왕)의 웅대한 기상을 들려주고자 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으로 칭했고, 하늘을 지키는 사람(守天)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기상과 기개를 돌려 받는다면 통일에도 한 걸음 가까워지지 않겠어요?"

1월23일 첫공연을 위해 연습에 한창인 <수천> 출연진.
1월23일 첫공연을 위해 연습에 한창인 <수천> 출연진. ⓒ 홍성식
<수천>의 주인공은 동몽골 초원에서 1500년을 살아온 수천(여)과 장하독(남). 이들은 고구려시대와 고려시대, 일제시대를 넘나들며 부부(夫婦)와 부녀(父女), 모자(母子)로 역할을 바꿔가며 한민족의 판타지를 연기한다.

살아가는 시대는 다르지만 '땅은 스스로 경계를 긋지 않는다. 내 땅과 네 땅으로 나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은 인간일 뿐이다'는 호태왕의 정신을 이어가고,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치더라도 이 땅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수천과 장하독은 웅대한 고구려인 혹은, 한민족의 정신적 복원을 상징한다.

다시 그들은 싸움의 현장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바로 이 '위대한 정신'의 부활을 통해 386 문화전사들이 세상에 발언하고 싶은 것은 뭘까? 이 대목에 관해선 김정환과 신동호가 같은 목소리를 낸다.

"문화적 불모지에 살고있는 젊은이들을 극장으로 불러모으고 싶어요. 물론 이 젊은이란 단어 속에는 386 세대도 포함되어있겠지요. 군사독재에 맞서 자신을 희생하며 싸웠고, 지금은 나름의 영역에서 세상의 한 몫을 담당하며 살고있는 그들에게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대중추수주의와 상업연극이 판치는 대학로의 문화를 바꾸어보자는 의도도 없지 않아요. 사상과 일치를 이루는 미학과 예술을 통해 서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웅대한 판타지를 보여줌으로써 연극판과 뮤지컬계에 신선함을 던져주고 싶습니다."

뮤지컬 <수천>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있다. 바로 고(故) 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고 문호근이 93년 창단한 '가극단 금강'. <수천>은 '가극단 금강'의 배우들에 의해 하나의 온전한 작품으로 완성된다.

'금강'은 서양의 오페라와 한국의 창극을 바탕으로 특유의 서사와 함께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가극'이란 장르를 발굴해 무대에 올린 극단으로 94년엔 <가극 금강>, 95년엔 <가극 백두산>(이상 문호근 연출), 97년엔 노래극 <구로동 연가>(김정환 연출) 등을 관객에서 선보여 호평받은 바 있는 중견 공연단체다.

뮤지컬 <대륙의 여인 수천> 포스터.
뮤지컬 <대륙의 여인 수천> 포스터. ⓒ 가극단 금강
김정환은 문호근에게 공연연출을 배운 제자로 문호근이 타계한 후 지금까지 '가극단 금강'의 대표를 맡고 있다. '금강'의 10주년 기념작이기도 한 이번 <수천> 공연은 김정환에겐 세상을 떠난 스승 앞에 당당한 제자로 서기 위한 통과의례로써의 의미도 가진다.

91년 봄이던가? 학교로 오르는 길목에서 '조국은 싸우고 있다'고 씌어진 플래카드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는 괜스레 가슴이 후끈 더워졌던 기억이 있다. 부패한 정권을 향해 화염병과 돌멩이를 날리는 것만이 싸움은 아닐 것이다.

윤민석과 안치환, 김정환과 신동호는 80년대의 '아스팔트'가 아닌, 바로 오늘 이곳 2003년 '극장'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다. 그들의 적은 지난 시절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우리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모종의 열패감과 절망이다. 고구려인의 노래와 함성을 무기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들을 돕고싶다면 주저 말고 극장을 찾을 일이다.

<오마이뉴스>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창작활성화기금 수여작인 뮤지컬 <대륙의 여인 수천> 공연을 후원한다.

덧붙이는 글 | 공연예매: 1588-7890(티켓링크)
단체구입 문의: 02)501-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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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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