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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화물열차의 선로.(좌측이 북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화물열차의 선로.(좌측이 북한) ⓒ 김창배
북한은 1995년부터 1996년에 걸쳐 대홍수에 의한 자연재해와 사회주의 체제의 정책 실패로 식량난이 극심해졌다. 그로인해 북한의 주민들은 북쪽의 국경을 넘기 시작했고, 강제 노동자들로부터 시작한 탈출은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이어졌다.

두만강 주변의 북한과 중국
두만강 주변의 북한과 중국 ⓒ 김창배
중국을 국경으로 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일부는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의 탈출을 하지만, 대다수가 중국을 선택했다. 중국이 러시아보다 가깝다는 지리적인 위치도 있지만 문화적 습관이 비슷한 조선족이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동북지방의 길림성(吉林省)내의 도문(圖門), 연길(延吉), 훈춘(琿春)등은 조선족이 거주하는 대표적인 도시이다. 이곳은 조선족 자치구로 반수 이상이 한글을 사용하고 있고 언어적으로 불편이 적은 것과 같은 민족이 살고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탈북자들이 많이 찾는 곳 이다. 이외에 화룡(和龍), 용정(龍井), 삼합(三合)등 주변의 작은 마을 등도 탈북자가 주로 찾는 곳이기도 하다.

통일 국가의 미래를 짊어져 갈 아이들은

수많은 탈북자들 중에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은 청소년들이다. 통일 국가의 미래를 짊어져 갈 청소년들이 식량난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고, 성장기를 맞아 영양 섭취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육이 늦다. 청소년들 중에는 15-16살인데도 한글을 잘 읽지 못하기도 했고, 키는 150센티에도 미치지 못했다.

탈북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선생님 자신이 배가 고파 아이들 가르칠 기력이 없고, 아이들도 어떡하던 뭘 먹어야 하기 때문에 먹을 걸 찾으러 다니느라 학교에 가지 않는다” 고 한다. 그러던 중 중국에 가면 끼니를 때울 수 있다는 소문을 접해 듣고, 주위의 권위를 받은 어린아이들과 연고가 없는 청소년들은 어두운 밤 얼어붙은 강을 건넌다.

연길의 한 호텔 누군가가 호텔 앞에 서성거리고 있다.
연길의 한 호텔 누군가가 호텔 앞에 서성거리고 있다. ⓒ 김창배
실제로 2001년 3월에 만난 함경북도 무산군 00구에 살던 김00군 형제 같은 경우, 병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먹을 걸 찾아 중국에 건너 왔는데 소식이 끊기자, 어머니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온 경우이다.

북한을 왕래하면서 사는 도문의 꽃제비들

국경도시 도문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의 군인들이 주둔해 있다. 강폭은 100여 미터가 채 되지 않으며 겨우내 꽁꽁 얼어 있다. 1999년 3월 처음 꽃제비라고 불려지는 청소년들을 도문의 국경지역에서 처음 만났다.

이들은 5-6명이 같이 모여 다녔으며, 일부 아이들은 밤을 이용해 얼어 있는 강을 건너 북한을 왕래하면서 생활하기도 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중국에 건너와 며칠간 관광객과 중국인을 상대로 구걸하고, 모아진 돈을 고향의 가족들 생활비로 건네주고 다시 건너오곤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군인들과 내통하면서 모은 돈의 일부를 그들에게 지불하고 국경을 넘기도 한다는 것이다.

도문에서 생긴 일

▲ 해주의 소년이 숨었던 도문강 공원 옆의 폐가.
도문은 국경도시이다 보니 중국의 군인들이 간헐적으로 단속에 동원된다. 이들은 꽃제비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99년 3월 도문강(圖門江) 공원에서 아이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 중국의 군인들을 피해 아이들은 뛰기 시작했다. 수십여 명의 군인들은 아이들을 잡기위해 우르르 뛰어왔고,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처 도망치진 못한 황해도 해주와 강원도 고성의 소년은 바로 옆의 폐가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다 지나간 줄 알고 먼저 나온 고성의 소년은 늦게 걸어오던 군인들을 목격하고 재빨리 연기를 시작했다. “삼촌 사진 찍는 척 해요!” 라고, 몇 마디 할 줄 아는 소년의 중국어와 저의 연기로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 군인들의 의심을 받지 않은 데는 소년이 지난번 일본인 관광객에게 얻어 입은 깔끔한 옷과 신발이 위기를 모면하는데 한 몫을 했다. 그러나 같이 숨어있다 나중에 나온 해주의 소년은 그만 붙들리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군인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군인들이 왔던 길로 빠르게 걷는 우리들의 뒤편 저 멀리에는 소년이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군인들을 피해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은 몇 시간 후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잠 숙식을 제공 받는 조선족의 집에 다시 모였다. 군인들을 피하다가 그들의 보금자리까지 갈 수 있었는데, 그곳에는 해주 아이 이외 모두 안전하게 돌아왔다. 안00군과 정00군에 의하면 이렇게 잡힌 꽃제비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군에 끌려가 구타를 당한 후 북한에 송환된다고 한다. 안00군과 정00군의 경운 2번이나 잡혔다가 3번째 탈출로 도문에 와 있었다.


초라하지만 따뜻한 보금자리 “록상청”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연길은 조선족 자치구 안의 중소도시로 시내의 택시랑 상점의 간판에 한글과 중국어가 같이 표기되어져 있다. 연길은 도문(두만강 상류)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곳이며 도문보다 규모가 큰 호텔이나 시장이 여러 곳 있다. 따라서 사람의 왕래도 많아 꽃제비들이 생활하기 좋은 장소이다. 연길의 꽃제비들 중에도 도문의 꽃제비들처럼 북한을 왕래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지만, 돌아가는 걸 포기한 아이나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대다수이다.

하룻밤 3원의 돈을 주고 잠을 청하는 연길의 비디오방.
하룻밤 3원의 돈을 주고 잠을 청하는 연길의 비디오방. ⓒ 김창배
끼니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국밥 집에 들어가 얻어먹기도 하고 돈이 있는 날은 사먹기도 한다. 이들은 하루 종일 호텔이나 시장 등을 돌아다니며 돈을 모은다. 밤이 되면 시내에 있는 록상청(비디오방)에 들어가 의자에 누워 하루 밤을 지새운다. 그러나 여기서의 잠도 불안하기 그지없다. 갑자기 단속반이 들이닥쳐 꽃제비들을 잡아가기 때문이다. 전00군은 의자 밑에 숨었다가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다고 해맑은 웃음을 하고 얘기하기도 했다.

“죽을 사람은 다 죽었고.....”

연길과 도문이 아이들이 사는 곳이라면 국경도시 주변의 시골 마을은 성인들의 피난 장소이다. 꽃제비들이 도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반면 성인들은 도심에서 떨어진 훈춘, 삼합, 용정 등의 외곽의 마을에 숨어서 지낸다. 그러다가 탈북자들을 돕는 단체나 사람의 도움으로 중국의 내륙 깊이 들어가 생활을 한다. 일부 부녀자의 경우는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인에게 팔려가기도 한다.

지난 1999년의 3월에 이어 2001년 3월의 두 번째 취재를 갔을 때는 위와 같은 상황에 큰 변화가 없었고. 탈북자 수도 더 증가하지 않았다. 탈북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죽을 사람은 다 죽었고 탈출할 사람은 다 탈출했다”고 한다.

99년의 만난 아이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함경북도 온성군의 국경마을의 아이들이 많다보니 몇 몇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김00형제와 같은 마을에 살던 하00군에게 김00형제 중, 형은 잡혀서 북에 송환되고 동생은 단속을 피해 중국 본토 깊숙이 들어갔다는 얘길 접할 수 있었다. 큰 변화가 없던 상황이 지난해 여름부터 급변하기 시작하여 탈북자들은 단속에 걸려 강제송환 되기 시작했다.

삶의 기로에선 탈북자들

지난해 8월과 12월에 방송된 MBC 다큐스페셜에 의하면 “몇 차례의 외국 공관 진입으로 인해 중국의 탈북자에 대한 정책은 삼엄해 졌고. 특히 치외법권 지역인 외국 공관에 들어가도 강제로 끌려나오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탈북자들이 주로 살던 중국의 연길, 도문, 훈춘은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그 수가 거의 사라졌고, 그전부터 위기감을 느끼고 동북 지방을 떠나 중국 대륙에 들어가 살던 탈북자들조차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지난 95년과 96년 탈북자의 수가 증가할 때 각 언론 매체에선 앞 다투어 탈북자들의 실상을 다루고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그 당시 지금보다도 인권 문제에 둔감한 중국과 북한의 태도에 정부는 공론화 되는 걸 꺼려했다. 공론화 되면 그나마 묵인 속에 살고 있는 많은 탈북자들의 단속이 이루어질 거고 결과적으로 탈북자들에게 그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조심스러워 했다. 그러나 최근 몇 차례의 외국 공관 진입으로 우리 정부가 우려했던 대로 중국은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고 그로인해 많은 탈북자들이 강제 송환 되고 있다.

우리 정부와 세계 각국의 인권 단체들의 노력으로 제삼국에 탈북자 수용시설 건설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동안 공론화로 인한 탈북자들의 피해를 우려해 조심스러워 했는데,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전에 보여줬던 같은 민족에 대한 사랑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연길 역전 풍경 하나
연길 역전 풍경 하나 ⓒ 김창배
연길 역전 풍경 둘
연길 역전 풍경 둘 ⓒ 김창배
꽃제비들의 주무대, 연길의 서시장
꽃제비들의 주무대, 연길의 서시장 ⓒ 김창배
도문의 중국 세관, 사진의 중앙이 북한의 남양과 연결된 다리 입구
도문의 중국 세관, 사진의 중앙이 북한의 남양과 연결된 다리 입구 ⓒ 김창배
두만강가에서 본 북한의 국경마을 남양의 모습
두만강가에서 본 북한의 국경마을 남양의 모습 ⓒ 김창배
북한과 중국의 무역, 탈북자의 송환이 이뤄지는 남양다리
북한과 중국의 무역, 탈북자의 송환이 이뤄지는 남양다리 ⓒ 김창배

덧붙이는 글 | 1999년과 2001년 꽃제비들과 탈북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기 중국을 방문했으며, 그때 20여명의 꽃제비들과 10여명의 탈북자를 만나 스케치 했던 화일입니다. 통일이 된 후 열려고 닫아 놨던 화일인데 갈수록 심각해 져가는 탈북자 문제의 심각성을 느껴 열게 됐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문제는 통일국가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니 보다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때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그때 만난 꽃제비들의 모습을 두 번정도에 나눠 담아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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