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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들어 한동안 사마천의 '사기 열전'을 읽었습니다. 여섯 해째 텔레비전 없이 살다보니 겨울밤이 길기만 합니다. 겨울밤을 잘 보내는 데 역사책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룻밤에도 수백, 수천 년을 종횡으로 오갈 수 있으니 그 시간만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역사라는 것이 어째서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비추는 거울인지를 새삼 확인합니다. 어떠한 역사의 거울에 비쳐진 얼굴도 어제의 내가 아니라 오늘의 내 얼굴입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 열전'을 읽으면서, 때로는 가슴 벅차고, 때로는 비통하고, 때로는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사기 열전 70편,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지만, 그 중에서도 내게 가장 깊은 감동을 준 것은 '골계열전'의 서문표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알고 계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유쾌하리라 여겨집니다. 서문표는 춘추전국시대 위나라의 목민관이었습니다. 조금 길지만 김원중 선생이 번역한 을유문화사 판 '사기열전'에서 옮겨 적어 봅니다.
위(魏)나라 문후(文侯) 때 서문표가 업현의 현령이 되었다. 서문표는 업현에 이르자마자 장로(長老)들을 불러놓고,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장로들이 말했다.
"하백(河伯, 황하의 신)에게 신부 감을 바치는 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가난합니다." 서문표가 그 이유를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업현의 삼로(三老; 鄕에서 교화를 담당하는 관리)와 아전들은 해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수 백만 전을 걷는데, 그 가운데 하백에게 여자를 바치는데 2,30만전을 쓰고 그 나머지는 무당들과 나누어 가지고 돌아갑니다.
그 시기가 되면 무당이 백성들 집에서 예쁜 처자를 발견하여, '이 애가 하백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고 하고는 폐백을 보내주고 데려 갑니다. 처녀를 목욕시킨 뒤 촘촘하게 짠 비단으로 옷을 지어 주고, 조용한 곳에 머물게 하여 재계시킵니다.
재궁(齋宮; 조용히 머물며 재계하는 곳) 물가에 짓고 두꺼운 비단으로 만든 붉은 장막을 치고는 처녀를 그 안에 있게 합니다. 쇠고기와 술과 밥을 줍니다. 열흘쯤 지나 화장을 시키고 여자가 시집갈 때처럼 이부자리나 방석 같은 것을 만들고 그 위에 처녀를 태워 물 위로 띄워보냅니다. 처음에는 떠 있지만 수 십리쯤 흘러가면 물에 가라앉고 맙니다.
그래서 어여쁜 딸을 가진 집에서는 무당이 하백을 위하여 자기 딸을 데려갈까 두려워하며 이 때문에 딸을 데리고 멀리 달아나는 자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여 성안에는 더욱 사람이 줄어 비게 되었고 또 가난해졌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도 실로 오래되었습니다.
민간의 속어에도 '하백에게 아내를 얻어 주지 않으면, 백성들을 익사시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서문표가 말했다.
"하백을 위해 아내를 얻어 주려고 할 때 삼로, 무당, 부로들이 처녀를 물 위로 보내거든 와서 알려주기 바라오. 나도 가서 그 여자를 전송하겠소."
모두들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 날이 되어 서문표가 물가로 나갔다. 그곳에는 삼로, 관속, 호족, 마을의 부로들이 모두 모여 있었으며, 구경나온 백성들도 2~3000명은 되었다. 무당은 일흔 살이 넘은 노파로 여 제자 10여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모두들 비단으로 된 홑옷을 걸치고 무당 뒤에 서 있었다. 서문표가 말했다.
"하백의 아내 감을 불러오시오. 내 그녀가 아름다운지 추한지 보겠소."
장막 안에서 처녀를 데리고 나와 서문표 앞으로 왔다. 서문표는 그녀를 본 뒤 삼로, 무당, 부로들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처녀는 아름답지 않소. 수고스럽겠지만 무당 할멈은 황하로 들어가서 하백에게 '아름다운 처녀를 다시 구해 다음에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려 주시오." 그리고 바로 이졸들을 시켜 무당 할멈을 안아서 황하 속으로 던졌다.
조금 있다가 서문표가 말했다. "무당 할멈이 왜 이렇게 꾸물거릴까? 제자들은 가서 서둘라 하라." 제자 한 명을 황하 가운데로 던져 버렸다. 조금 지나서 말했다. "제자가 왜 이토록 꾸물거릴까? 다시 한 사람을 보내 재촉하게 하라." 또 다시 제자 한 명을 황하 속으로 던졌다.
모두 세명을 던지고 서문표가 말했다.
"무당과 제자들은 여자이기 때문에 사정을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것이오. 수고스럽지만 삼로가 가서 하백에게 말씀드려 주시오."
다시 삼로를 황하 물 속으로 던졌다. 서문표는 붓을 관에 꽂고 몸을 경(磬)처럼 굽혀 물을 향해 꽤 오랫동안 서 있었다. 곁에서 보고 있던 장로와 아전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했다. 서문표가 돌아보며 말했다. "무당과 삼로가 모두 돌아오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다시 아전과 호족 한 사람씩을 물로 들어가 재촉하게 하려 하니,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이마가 깨져 피가 땅위로 흐르고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 서문표가 말했다.
"좋다. 잠시 머물거라. 잠깐만 더 기다려 보자."
조금 있다가 서문표가 다시 말했다.
"아전들은 일어서라. 하백이 손님들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 같다. 너희들은 모두 돌아가라."
업현의 관리나 백성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 이 이후로는 감히 다시는 하백을 위해 아내를 얻어주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통쾌하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명석한 판관의 심판입니까. 지난 연말 대통령 선거에서는 우리들이 서문표같은 판관이 되어 '삼로와 무당과 부로'들을 저 준엄한 역사의 강물에 처넣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때 처녀를 구해내고서 우리는 얼마나 통쾌했습니까.
하지만 아직도 이 사회에는 '삼로와 무당과 부로' 같은 자들, 그들이 활개치도록 뒷받침해주는 제도와 관습과 법률이 남아있습니다. 여전히 서문표의 지혜와 결단이 필요한 시대이지요.
이제는 우리가 구해낸 그 '처녀'가 서문표가 되어 '삼로와 무당과 부로' 같은 세력들을 역사의 강물에 처넣어 버릴 수 있을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 볼 일입니다. 오늘은 겨울 한낮이 봄처럼 따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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