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지하의 화두(話頭)가 '생명과 율려'에서 '붉은악마와 촛불'로 넘어온 것일까? 최근 출간된 <김지하의 화두>(화남)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읽히는 책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한복판을 뜨겁게 살아온 노시인은 디지털 세대의 함성과 응집력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기대와 궁금증에 조바심치며 책장을 연다.
예상을 넘어서는 전폭적인 지지와 추켜세움이다. 김지하는 '촛불'이라 이름 붙인 산문을 통해 2002년 12월의 광화문을 '촛불바다'로 만들었던 젊은이들에게 최상의 헌사를 바치고 있다. 이런 구절이다.
'(촛불시위는)경건한 촛불의 제사다... 단순히 억울한 넋만이 아니라 민족의 넋, 그 혼의 지극함과 그 혼의 깊음과 그 혼의 슬기를 부르고 있다. 민족혼은 세계와 삶에 대한 민족 자신의 사상이며 민족 자신의 평화와 생명을 위한 영성의 메시지이다.'
이어 시인은 촛불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지난해 초여름 한일월드컵 당시 광화문을 가득 메웠던 700만 명의 붉은악마라는 데 주목한다. 이 붉은악마가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일대를 붉게 불들이며 외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김지하는 붉은악마의 함성과 박수소리가 '현대 인류사회와 지구의 대혼돈, 천민화한 자본주의, 생태계의 전면적 오염을 해결할 수 있는 새 삶의 원형'이라고 파악한다.
이 무한광대한 에너지를 근거로 시인은 독일의 신비주의학자 루돌프 슈타이너를 인용해 '한국이 인류문명의 대전환기에 새 문명, 새 삶의 원형을 제시할 성배(聖杯)민족'이라고 단언한다. 김지하에겐 붉은악마의 함성과 스스로 몸을 사르는 광화문의 촛불이 새 시대 젊은이들이 제시하는 새 삶의 원형으로 다가온 것이다.
김지하는 이런 충고도 놓치지 않는다. '촛불이 미군철수 주장과 같은 극단적 반미주의로 기울어서는 안 된다'는 것.
김 시인은 이 주장의 이유로 '깊고 넓게 연결된 경제사회적 한미관계를 감안할 때 극단적 반미는 비현실적인 관념론'이라는 것과 일본의 핵무장과 중국의 대대적인 군사비 증강, 냉전적 남북관계의 재발 등 미군철수 후 예상되는 동북아 정세의 불균형과 공황을 들고 있다.
<김지하의 화두>가 붉은악마와 촛불시위에 대한 시인의 견해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지난해 각종 사회단체와 공공기관에서 행한 강연이 일목요연하게 정리·수록됐고, 일본 진보세력의 직무유기와 고대사 조작, 민족주의와 우경화경향 등의 문제를 가지고 일본의 학술문예지 <세카이(世界)>와 대담한 내용도 '동아시아 문명의 비전'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꽃과 그늘, 그곳에 이르는 길'이란 소제목이 붙은 글에서는 김지하 문학과 미학의 탄생비밀을 엿볼 수 있고, '인터넷의 쌍방향성과 홍익인간'에서는 바람직한 디지털시대의 도래를 위해 시인이 제시한 복안이 실렸다. 수운 최제우의 역사적 복권을 주창한 '수운의 복권과 천지공심' 역시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