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공중파 방송의 저녁 아홉시 종합뉴스를 시청하고는 또 하루를 접는다. 그런데 매일매일 접하게 되는 뉴스(news)이건만 이의 보도 내용들은 부정적인 유형을 이루어 한결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우울하고도 서글프게 만든다. 매일 매일의 보도 내용을 간추리면 한결같이 부정적인 것으로 유형화된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반향은 거의 무감하다고나 할까. 사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또 그 존재를 이제 당연시하는 세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의가 물질과 결부된 것이어서 우리들의 삶에서 물질의 위의(威儀)를 새삼 깨닫게 되고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 시대에 횡행하는 자본주의의 문화 풍토에 대해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자본주의'라는 용어는 17-19c 서구의 산업혁명기 이후 대두한 근대적 생산방식을 뜻하는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생산 방식이란 하부구조로 빚어지는 상부구조까지 포함한 현대인간의 보편적 문화양식으로 이해되어진다.)

1956년인가. 영국의 문화비평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평론서 한 권이 소개되었다. 당시 약관 24세의 나이인 C.윌슨이 발간한 < The Outsider>란 책자다. 당시 현존하는 사회 질서에 대해 반항하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자칫 일탈행위자 또는 부적응자로 간주되기도 했던 '아웃사이더(局外者)'를, 실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깔려 있는 속물성(俗物性)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윤리적 존재로서 정의한 바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픽션 논픽션을 막론하고 많은 비극적(?) 인간상을 다룸으로써 활발한 이론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그 후 이에 바탕한 영국의 젊은이들의 저항운동인 앵그리 영맨(Angry young man)이 출현되기도 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문화의 현실적 풍토를 당연시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과 의식이 그런 것에 침윤되어 허덕거리더라도 이를 당연시하고 거부하는 몸짓조차 짓지 않는 세태 속에서 아웃사이더들은 어쩜 일탈행위자들로만 여겨질 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50-60년대의 미국 사회에 등장한 비트제너레이션(beat)과 히피제너레이션(hippie)은 다소 낭만적인 열정에 젖어 있기는 했었지만 자신의 삶을 나름대로 뜨겁게 부여잡고 있었다.

이들은 개인주의를 부정하고 물질주의의 노예화를 강요하는 자본주의라는 문명의 억압과 구속을 벗어나려는 몸짓인 위대한 거부를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성을 압살하는 물질문명과 국가와 사회의 제도와 그 메커니즘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해방시키기 위해 문명의 위압에 반항하는 캠페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 놀리면서 밖에 보내네.
아! 가겠소. 난 가겠소. 저 언덕 위로 나는 가겠소.
여행 도중에 처녀 만나 본다면 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한국 포크의 선구자, 한 대수의 <물 좀 주소!> 전문


문명이 더욱 발전한다면 삶은 더욱더 만족스러워야할 텐데, 시인은 오히려 목이 마르다고 한다? 영혼이 목말라 그 갈증을 달랠 생명의 물을 애타게 갈구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의 비애를 달래줄 수 있는 하늘의 은총은 닿을 길이 없다. 그래서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1960년대 서울의 문화가라 할 수 있는 명동과 무교동의 뒷길을 통기타 하나 들고 걸어가는 두 인물, 이름하여 음유시인 한대수와 가요평론가 이백천,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한 곡의 노래와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한 끼의 식사와 목마름을 달랠 수 있는 캔 하나의 맥주 그리고 하루의 고단함을 해결할 수 있는 잠자리만 있으면 더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집요하게 따르며 짓누르는 괴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디로 나아가는지도 모르는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은 문명의 비틀거림이었다.

물질 중심, 인간성 상실, 자기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자기로부터의 도피 등 자본주의 문화의 왜곡상들. 문제적 개인 또는 창조적인 소수자로서는 거부하는 몸짓조차 허락하지 않는 매카니즘의 강압만이 기세를 드올리는 세태와 풍조 앞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히피- 종래의 사회 통념이나 제도, 관습 및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과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표방하여 일상적이 아닌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젊은이들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이 되는 것만이 삶의 위안이요 구원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문명의 갈증을 생명의 물로 달래려는 것이다. '물 좀 주소 목마르오.'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더 느껴 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 주소. 봄과 새들의 노래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한 대수의 <행복의 나라> 제 1절


'이 시대의 마지막 히피'가 되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염(?)시키고 싶다'란 소망을 피력한 한대수가 생각하는 행복의 나라는 '두텁게도 드리운 장막'이 사라진 곳으로 어쩜 자연과 자연할 수 있는 그러한 세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존재가 무위자연할 수 있는 세계란 일종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일 따름이라, 없는 세계(U-topia)이기에 또 다시 절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70년대 중반 미국으로 떠나 현재 한국의 대표 아티스트라 지칭되며 뉴욕의 뒤안에서 활동중인 한대수는 극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문화의 첨단에서 더더욱 절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 다음과 같이 외치고 만다. 물이 오염되어 물 안에 살던 물고기가 물위의 땅에 뛰어올라 살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 서구 자본주의 문화의 대안은 동양적인 사상이요 그 정신이다. 어쨋든 그는 절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문명의 불안과 우울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근대는 그러한 저항을 비웃는 듯이 질주하고만 있었다. 방향의 정체성을 확인할 여유도 주지 않고 질주하는 문명의 회오리와 같은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은 자기 상실을 슬퍼하고만 있다. 그런데 그 혼돈의 상황은 나락(奈落)으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화된 현대의 담론(談論)이다. 하여 현대의 허무와 절망에 휩싸인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이의 문명 상황에 맞서 히피처럼, 아니 한 대수처럼 거부하는 몸짓을 지어 봄은 실로 위대한 실천임 셈이다. 이 시대의 보편적, 일반적 존재들이 현대문명을 부여잡고 때로는 희롱하고 짓까불고 때로는 아부하며 등쳐먹을 때, 그래도 사유하고 절망하며 거부하는 몸짓을 지어 봄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