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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엄마가 어린 사내아이를 데리고 영성체를 하러 나왔다. 신부님으로부터 성체를 받아서 입에 넣은 순간 아이가 앙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먹는 것을 왜 저한테 주지 않고 엄마만 먹었느냐는 뜻이었다. 아이는 울음보를 터뜨렸다. 당황한 엄마는 마구 몸을 뒤트는 아이를 안고 허겁지겁 성당 밖으로 나갔다.
그 광경을 보면서 신자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머금었다.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부님부터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체 분배를 마치고 성작을 감실에 넣는 동안 신부님은 줄곧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신부님의 얼굴은 다소 미안한 빛이기도 했다. 아이에게 미안한 나머지, 그럴 줄 알았으면 과자라도 준비해서 복사 손에 들려놓았다가 줄 걸…그런 생각이라도 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난해 이맘때도 평일미사 중에 우스운 일이 있었다. 축성례 때였다. 처음 미사 복사를 하는 여자아이가 이상하게 종을 잘 치지 못했다. 어떻게 친 것인지 종이 맑은 소리 대신 작고 짧고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한 손으로 종을 잡고 친 모양이었다. 당황한 아이는 세 번째는 종에서 손을 떼고 세게 쳤는지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신자들은 분심이 들어 얼굴을 찡그리는 이가 많았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신부님의 눈치를 보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벌어졌다. 신부님은 웃음을 참느라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한참이나 있다가 "신앙의 신비여"를 하는데, 그 짧은 경문도 웃음 때문에 이상한 음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신자들도 웃을 수밖에. 다같이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하는데, '주님의 죽음' 소리를 하면서도 웃는 이들이 많았다.
지난해 1월초 부제품을 받은 방 부제(지금은 사제)가 부제로서는 처음으로 신부님을 도와 미사를 지낼 때였다. 신부님을 대신하여 강론을 한 그는 강론 초두에 부제품을 받은 것과 관련하여 인사말을 했다. 강론을 마친 그가 의자로 가서 앉고 잠시 모두 묵상을 한 다음 일어섰을 때였다. 신부님은 신앙고백을 시작하기에 앞서 부제로서 첫 번째 강론을 잘한 방 부제님을 위해 모든 신자들에게 박수를 부탁했다. 그런데 신자들이 박수를 치고 났을 때 신부님이 이런 말을 했다.
"사실은 신세 조진 건데."
순간 온 성당 안은 폭소로 뒤덮였다.
지난 2000년 2월 어느 날 저녁 평일미사를 지낼 때였다. 신부님이 복음을 읽고 나서 짧게 강론을 하는 시간에 이런 말씀을 했다. "아빠는 전례봉사로 주송을 하고 딸은 오르간 반주를 하고 아들은 복사를 서고…. 참 좋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참 좋아 보이지요?"
그러자 신자들이 모두 "예"하고 대답했다. 신부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 형제님이 늦게 결혼해서 자녀들을 늦게 보셨는데, 참 잘 기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다같이 박수 한번 칩시다"하시는 게 아닌가.
신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고 나니 이번에는 또, "지 형제님이 나이 사십에 결혼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희망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지요"라는 말을 해서 신자들이 모두 이번에는 까르르 웃었다.
50년 넘게 세상을 살아오고 또 신앙 생활을 해오면서 성당에서 미사 중에 신부님과 신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아보기는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견진성사 전례봉사 후에 주교님으로부터 고맙노라는 말씀을 들은 적도 있고, 성가대원들과 함께 박수를 받은 적들은 여러 번이지만….
그 신부님이 우리 성당에 와서 맨 처음 한 일은 구호 봉사단체인 <빈첸시오회>를 만든 일이었다. 몸으로 뛰는 활동회원과 매월 후원금을 내는 후원회원으로 구성된 우리 교회의 빈첸시오회는 신부님의 적극적인 관심에 힘입어 행정 공무원인 명승식 회장과 여러 활동회원들이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의 손길을 뻗쳐올 수 있었다.
신부님은 일년에 한 번이나 두 번씩 만주 연변을 다녀오시곤 했다. 천주교 대전교구에서 연변 지역의 노는 땅을 빌려 마련한 수십 만 평의 감자농장에 파종 시기나 수확 시기에 가서 열흘이나 보름씩 노동을 했다. 수확 시기에는 수확한 감자들을 모두 북한 동포들에게 수송하는 일까지 마치고 돌아오신다고 했다.
과묵하면서도 세심하고, 매사에 의연하면서도 자상하신 분이었다.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신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민족 분단 문제나 북한 이야기를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 대신 그렇게 행동으로 자신의 '의지'를 실천해 온 분이었다.
지지난 주일 (12일) 교중 미사 때 신부님이 이런 말을 했다. "해마다 이맘때면 신자들이 '사제 이동'에 대해서 부쩍 관심을 갖게 마련인데, 여러분도 그러시겠죠?"
일부 신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저도 올해는 발령이 납니다. 이곳에 온지 벌써 4년이나 되었으니…. 그런데 제가 어디로 발령이 날 것 같습니까?" 그 말에 신자들이 바짝 긴장을 했을 때였다. "저는 태안 본당으로 나는 게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자 모든 신자들이 기쁜 웃음을 터뜨리며 일제히 박수를 쳤다.
신자들은 한결같이 신부님의 유임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신부님과의 정도 정이지만,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새 성전 건립이라는 큰 과제 때문이기도 했다. 2월 9일로 '기공식'이 예정되어 있는 성전 건립 사업은 그것을 시작한 신부님이 완공까지 해야만 하는 것으로 신자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제 서품식 날이었던 지난 14일 오후에 발표된 대전교구 '사제 이동'은 우리 교회 신자들에게 너무도 의외였다. 우리 교회 신부님도 포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신자들의 충격과 섭섭함은 참 대단했다. 눈물을 짓는 신자들도 많았다. 신부님이 다른 본당도 아닌 대전문화회관장(교구 가정사목 담당 겸)으로 가는 것을 동정(?)하는 신자들도 없지 않았다.
앞에 계시지도 않는 주교님께 불평을 하는 신자들 앞에서 신부님도 조금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신자들을 위로했고, 새로 부임하실 신부님에 대해 좋은 기대들을 가지도록 유도했다. 사제들의 이동, 그 순환이 우리 교회에 얼마나 필요하고 유익한 것인지를 다시 설명해 주었다. 이미 열 번 이상 사제 이동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교회 신자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이었지만….
지난주일 (19일) 우리 교회의 교중미사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침울했다. 제11대 주임사제인 김종기 신부님의 '송별미사'인 탓이었다. 미사 후에 가진 간단한 '송별식'에서 우리 성가대는 신상옥 작사 작곡인 <영원한 우정>을 불렀다. 연습 때부터 아릿한 감정을 느껴온 나는 송별식 시간에 동료 단원들과 함께 그 노래를 부르면서 솟구치려는 눈물을 참느라고 애를 써야 했다. 50이 훌렁 넘은 이 나이에….
어제(23일)는 대전교구의 80여 명의 사제들이 이동을 하는 날이었다. (대전교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사 이동이라고 했다.) 따라서 김종기 신부님이 우리 본당에서 마지막으로 평일미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원래 목요일에는 오전 10시 30분에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미사를 지내왔는데, 이날은 새벽 6시에 지낸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이 새벽미사에 모두 참례했다. 다섯 식구가 모두 새벽 평일미사에 참례해 보기는 처음인데, 기특하고 고맙게도 두 아이 모두 스스로 신부님 떠나시는 날 마지막 미사에 참례하고 싶다고 한 덕이었다. 잠꾸러기들이 새벽에 한 번 깨우니 쉽사리 일어나는 것이었다.
김종기 신부님은 어제 오전 9시 30분 많은 신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지난 4년 동안 머물렀던 우리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오전 11시경에는 도고 교회에 지난 6년 동안 계셨던 구본국 신부님이 역시 많은 신자들의 영접을 받으며 우리 교회에 부임했다. 부임하시는 신부님을 보면서 나는 그 신부님 역시 먼저 계시던 교회를 떠나오면서 많은 신자들에게 석별의 아픔을 안겨 주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신부님들을 배웅하고 영접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나는 문득 '꽃동네'를 생각했다.
사제 이동을 보고 겪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천주교 사제들의 이동은 참으로 아름답다. 나는 거기에서 천주교 성직자들의 '순명' 정신을 체감한다. 주교의 명에 따라 오지든 외국이든 군대든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불평 한마디 없이 자리를 옮기는 천주교 사제들의 순명 정신은 '청빈'에 의해서 더욱 가능하다. 또 그것의 원천은 독신 '정결'에 있기도 하다.
가톨릭의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는 정결과 청빈과 순명이 생명과도 같다. 그 세 가지가 '삼위일체'를 이룸으로써 그들은 바르게 존재할 수 있다. 수도자들에게는 그것이 절대적인 의무 사항이고, 일반 사제들에게는 그 세 가지 중에서 '청빈' 항목에 다소 융통성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직자들 역시 세 가지를 준수성범으로 자신의 삶 안에 깊이 내재화하고 있다.
가톨릭 성직자들의 정결과 청빈과 순명, 그 삼위일체적인 것을 가톨릭 신자들은 한결같이 우러르고 존중한다. 천주교 신자들의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대한 가없는 사랑과 존경의 밑바탕에는 그 삼위일체적인 것에 대한 감복이 존재한다. 그 감복은 일종의 보호본능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톨릭 성직자들의 정결과 청빈과 순명, 그 삼위일체적인 것에 간혹 어떤 이상이 발생하고 일종의 위해나 흠결이 노정되기라도 하면 그것은 곧바로 가톨릭 신자 모두에게 큰 슬픔과 상처가 된다. 그것은 단순한 충격과 안타까움이 아니다.
나는 작금에 뉴스의 한복판으로 떠오른 '꽃동네' 관련 보도들을 보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슬픔과 상처를 본다. 나 역시 그런 보도 자체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꽃동네 사건을 제대로 보려면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들의 정결과 청빈과 순명, 그 삼위일체적인 것의 본질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어느 정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꽃동네의 외형이 무척 비대해졌고 그만큼 재정 관리 문제가 방만해졌으리라는 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상황이 어떠하든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들의 청빈 정신을 지키려는 교회공동체의 노력은 항시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것의 일환으로 오웅진 신부는 별도의 '꽃동네수도회'를 창설하면서 수도사제의 길에 들어서기도 했다.
수도사제는 일반 사제들보다도 청빈에 대한 규율이 더욱 엄격하다. 교회법적으로 일체 개인 재산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순명 부분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꽃동네에 대한 교구교회의 장악력이 매우 느슨해져 있었음은 인정할 수 있다. 꽃동네가 별도 수도회를 창립하는 등 거의 독립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교구교회의 통제 밖에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교회공동체의 수도회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꽃동네의 모든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교회공동체의 폭넓은 시야와 성찰이 필요한 일로 여겨진다.
꽃동네에도 정기적인 사제 이동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사제 이동으로 손쉽게 표출되는 그 순명 정신의 발화가 꽃동네에도 계속 이어져왔다면, 다시 말해 사제 이동을 통해 교회공동체의 피돌기가 순환적으로 잘 이루어졌더라면, 꽃동네에 대한 이번의 의혹은 아예 처음부터 차단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검찰의 수사까지 불러온 꽃동네에 대한 의혹은 음해 세력의 책동에 대한 의심을 고조시키는 한편으로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들에 의해 구현되는 정결 청빈 순명, 그 삼위일체적인 것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그 삼위일체적인 것을 되살려내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하고, 종국적으로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 삼위일체적인 것은 가톨릭의 최고 특징이며 가치다. 꽃동네의 의혹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가톨릭교회의 그 특징과 가치로부터 큰 자부심을 가져온 신자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음해 세력의 책동이 감지되는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 신자들은 이번 꽃동네 수사 사건을 겸허한 마음으로, 또 자성하는 마음을 곁들여 바라보아야 한다.
꽃동네의 정당한 해명도 사회 일반의 외혹을 온전히 불식시키기는 어렵게 된 상황 속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계속적으로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을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번 꽃동네 수사 사건을 가톨릭의 최고 특징을 다시 확인하고 굳게 지키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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