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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는 글

지난 금요일(1989. 5. 5.) 그 동안 백혈병으로 입원중이었던 양란경양이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사랑으로 기도했던 덕분으로 고통 없이 평안한 가운데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학생회에서 양란경양을 위해 모금한 성금 120만1484원은 다행히 그가 떠나기 바로 전날 몇 분 선생님과 학생회 임원들이 전달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노력이 양란경양의 생명을 잇지 못해 아쉽지만, 여러 학우들이 베푼 사랑과 정성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벌써 10여 년전, ‘학생회 알림판’에 붙은 글이었다. 한 생명이 미처 피지도 못한 채 불치병으로 쓰러져 갔다. 양란경양은 2학년에서 휴학한 학생으로 학교를 계속 다녔으면 3학년이 될 학생이었다.

그해 4월 초순, 학생회 발대식 날 대의원 총회에서 대의원 이지영양의 긴급 동의로 한 학우가 병마에 신음하고 있다면서 그를 돕자고 눈물을 글썽이며 호소했다.

대의원 홍은혜양도 일어나 그의 딱한 처지를 얘기하려 했으나 목이 메어 말을 잇질 못했다. 그들의 눈물 어린 호소는 대의원 총회장을 숙연케 했고, 곧 만장일치로〈양란경 돕기 위한 소위원회〉가 구성되고 거교적인 모금운동이 가결됐다.

소위원회에서는 전교 학생들에게 알릴 벽보를 만들어 학생회 알림판에 붙이고, 모금함을 만들어 교내 곳곳에 설치했다. 소위원회 위원들은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을 이용하여 각 반 교실을 돌면서 모금 운동을 펼쳤다.

일주일 동안 꽤 많은 성금이 모였다. 입원 치료비가 급할 것 같아서 이현숙 교목님, 학생회 임원들과 함께 적십자 병원으로 갔다. 그의 입원실에는 ‘면회 금지’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성금만 전달하고 떠나오기 아쉬워 담당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입원실로 들어갔다.

양 양은 숨을 헐떡이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몸을 가눌 수 없어 동생은 침대 위에서 언니의 상체를 껴안고 아버지는 딸 앞에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찬송가를 불렀다.

그의 온 몸은 제 몰골이 아니었다. 이미 시력마저 잃었고 피부는 멍든 것처럼 퍼런 반점으로 온통 뒤덮었다 . 그의 언니가 친구들이 문병을 왔다고 크게 소리치자 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간 나는 좀더 일찍 찾아오지 못한 게 죄스러웠다. 대의원 총회에서 두 여학생이 울먹일 때, 그들이 소녀적인 감상이 지나쳐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은 아무리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육신의 고통을 잊고 다가오는 죽음의 사신을 담담히 맞고자 찬송가를 거듭 불렀다. 꽃다운 나이에 가물가물 스러져 가는 촛불이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눈자위를 붉혔다. 입원실을 나온 후에도 모두 말을 잊었다.

그래 살리자! 꺼지는 불씨에 기름을 붓자! 이 참혹한 딱한 사정을 우리 학교 모든 식구들에게 좀 더 널리 알리자. 우리 학교 일천여 식구들이 돕는다면 이 한 생명을 못 살리랴.

그 날 밤, 늦도록 그의 모습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이 어린이날이라 그 다음날 아침 등교했을 때, 그의 비보를 받았다. 이틀 간 그렸던 홍보와 모금 방법은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연희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르던 날, 아버님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울먹였다.

“너무너무 불쌍해서 화장을 못하겠어요. 부모 잘못 만난 탓으로 어린 나이에 몹쓸 병이 들어 그만…….”

스승의 날, 양란경양 언니가 꽃바구니를 들고 학교로 찾아왔다.

“선생님, 저희 형제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우리 난경이 대신에 어려운 한 학생의 등록금을 돕고 싶어요.”

“고맙습니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이 소중하지만, 형제분들이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제적인 여건도 넉넉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의 그 뜻을 잃지 마시고 이 다음 어른이 된 후에 더 많은 이웃을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양란경양, 그는 떠났지만 숨을 헐떡이며 찬송가를 부르던 그 모습과 친구를 위해 눈자위가 빨갛게 눈물 흘리던 두 학생과 모금함을 들고 교실마다 찾아다니면서 딱한 사연을 호소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진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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