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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고전을 만나듯이 사람을 만나야하는 것인가요. ‘우리와 고전의 만남’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인지요. 우리는 ‘만나’ 정치적 행위를 하고, 예술은 ‘만나’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예술은 정치적이고, 정치는 예술적이어야 합니다. 이 ‘정치적 예술’은 ‘만남을 지향하는 예술’입니다. 이 만남이 우리의 현실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정치적 예술은 그리스에서 ‘비극’(tragodia)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리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같이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 존재의 조건은 먼저 내 이웃의 슬픔과 고통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성찰입니다. 이 책의 출발은 내 이웃의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고, 슬픔의 존재이유를 묻는 철학적 성찰로부터 시작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독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단순히 그리스 비극에 대한 책이 아니다. 사실 나는 그리스 비극을 핑계삼아 비극 예술의 의미를 물었으며, 더 나아가 세상에 넘치는 슬픔의 존재의 의미를 물었을 뿐이다.”(28쪽)
서양 고전학자인 이태수 교수는 ‘고전을 공부하려면 한 10년은 면벽(面壁)해야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지요. 고전을 공부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고전을 하기 위해서는 문헌학적, 미학적, 해석학적 그리고 철학적 능력까지도 요구하는 아주 지난(至難)한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여기 이만한 능력을 갖춘 철학자가 그리스 비극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이미 몇 권의 독창적인 저서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감성적이고 예민한’ 철학자 김상봉입니다. 그는 서양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리스 사상에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주체적 반성 의식을 세우기 위한 길을 닦았으며, 여러 측면에서 서양사상을 비판하고 나름대로의 철학적 통찰을 통하여 새로운 ‘우리의 철학적 시각’을 만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의 철학의 특징은 ‘나의 존재 의식과 주체적 반성을 통한 우리의 의식’을 창조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유럽 문학의 장르의 발전은 서사시, 서정시, 비극, 산문의 순서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것은 그들 현실의 정치적 역정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비극이 발전했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주주의’ 시대였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슬픔을 겪어야 했겠습니까? 그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기 위해 시민들이 광장(아고라)에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만남의 의미가 시작됩니다.
인간은 자유를 염원합니다. 비극은 자유를 향한 인간의 끝없는 투쟁과 행위입니다. 비극은 인간의 정신의 크기를 보여주는 시인의 노래입니다. 그 시를 노래하는 시인은 “술판의 흥을 돋우기” 위한 “기생”과 같은 시인이 아닙니다. 그 시인의 시가 기생의 노래에 지나지 않을 때는,
“시가 표현하는 아름다움이란 시인이 현실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증명하는 알리바이일 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시인이 사회․ 정치적 현실의 모순과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증거하는 알리바이인 것이지요. 이런 사회에서 아름다움이란 죽은 장식품, 거세된 아름다움인 것이지요.”(173쪽)
시인은 현실의 모순과 불의에 과감히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자는 서정주 시인을 비판하고, 현실에 눈 돌리지 않는 아름다움을 거부합니다. 그는 여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저자의 불편부당하지 않은 눈은 역사로 돌려져서, 일제시대로부터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아니 나의 존재를 위해 살다간 ‘위대한 인물’들을 기억합니다. 겉치레뿐인 역사에서 기록되지 못한 인물들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한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유관순이고, 전태일이고, 80년 광주의 도청 앞에 있던 사람들이고, 나 대신 굶주리고 옥에 갇혔던 사람들, 나 대신 피흘리고 목숨을 버려야 했던 사람들, 가까이는 지난해에 억울하게 죽어갔던 두 여학생이었습니다. 섬세한 감정의 눈과 치열한 논리의 머리를 가진 저자의 눈에는 박정희와 같은 인물이 아니라, 동일방직의 노동자와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한 주검에 대해서도 그냥 스쳐가지 않습니다.
김상봉의 눈에는 예술은 정의와 도덕을 함께 가지는 인간 존재의 외침이어야 하고, 자유에로의 끝없는 갈구이어야만 합니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그리스 비극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려는 연구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 상아탑에 갇혀 있는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게 가치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저자 김상봉은 여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그리스 비극이라는 그릇에 담아 우리 모두를 향한 깨우침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의 이해를 통해 우리를 ‘만남’의 광장으로 이끌려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해준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회상하고 그것에 감사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과 온전히 만날 수 있다. 바로 이 만남이 진리이다.”(29쪽)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그리스 비극을 넘어, 이 땅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는 모든 사람이 ‘우리’라는 ‘만남의 광장’에서 자유를 실현하는 그날을 희구할 수 있습니다. 그날이 다시 돌아오는 날, 우리는 “당신들의 수난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나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다 쓰고 난 후, 저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슬픔과 탄식을 제대로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윤동주 시인처럼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것이 그의 생각의 출발이었지만, 그 끝도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 말은 아직 슬픔과 고통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경박한 정신의 한가한 유희처럼 보이지나 않을지 나는 적이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 뿐입니다. 끝없는 슬픔의 바다에서 얼마나 더 깊은 심연으로 낮아져야 나는 당신의 슬픔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요?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의 깊이 앞에서 나는 내 모든 말이 참된 슬픔을 알지 못하는 자의 치기가 아닐까 하여 깊이 저어하고 또 두려워합니다.”(383쪽)
김상봉은 부끄러움에 머물지 않습니다. 거기에 머문다면 참된 슬픔과 고통의 의미를 모르는 허울에 불과한 철학자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는,
“하지만 그 부끄러움 때문에 내가 걷는 길을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더 낮아지고 낮아져 당신이 있는 가장 깊은 슬픔의 심연까지 내려가겠습니다. 어떻게 가장 깊은 슬픔 속에 참된 기쁨이 깃들이고, 어떻게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희망의 무지개가 떠오르는지 그 신비를 깨달을 때까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갈 것입니다.”(384쪽)
이렇게 그의 그리스 비극을 통한 이 땅의 슬픔과 고통을 당신에게, 아니 우리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편지는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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