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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면 막 배는 탈수 있겠지만 나는 해남에서 하루 더 머물고 싶어 읍내에서 대흥사 행 버스에 오릅니다.

대흥사 입구에 내려 경내까지 걸어들어 갑니다. 철지난 관광지, 연탄 화덕 불을 쬐며 군밤과 번데기를 파는 아주머니들 앞으로 관광객들이 몇이 드물게 오고 갑니다.

왕벛나무와 감나무, 도토리 나무와 상수리나무들 겨울 햇살에 은빛 가지를 반짝입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저 나무들보다는 나무들이 피워 올리는 화려한 꽃을 보기 위해 자주 산사로 왔습니다.

일생을 통하여 단 한번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많은 인생들처럼 나 또한 쓰린 가슴 쓸며 해마다 꽃피는 시절을 기다려 꽃을 찾아 다녔습니다.

벚꽃을 찾아 대흥사와 쌍계사로 갔고, 매화를 보러 선암사와 악양으로 갔습니다. 또 산수유를 보러 산동 마을로 갔습니다. 나는 언제나 꽃만 쫓아다녔습니다.

더러 겨울 나무를 찾기도 했으나 그것은 상록수들, 소나무와 잣나무,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들의 겨울에도 푸른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꽃도 아니고 늘 푸른 나무도 아니고, 헐벗은 겨울 나무를 찾아 이 고적한 산사까지 왔습니다.

잎 다 떨구고 서 있는 저 겨울 나무들. 빈 몸의 겨울 나무에게서 나는 무상함이 아니라 처절한 자기 갱신의 마음을 봅니다.

참으로 혹독한 야만의 계절. 모든 것을 다 버려야만 겨우 목숨하나 부지할 수 있는 절명의 시간들. 그런 겨울의 시간을 견뎌낸 나무만이 마침내 따뜻한 봄 햇살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 또한 그러할 테지요.

겨울 대흥사. 오늘에야 나는 사람이 꽃보다도, 늘푸른 나무보다도, 잎 지는 나무와 가까운 것을 알겠습니다.

늘푸른 나무보다 헐벗은 겨울 나무가 아름다운 것을 비로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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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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