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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팔타커스>. 1960년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 커크 더글라스,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
영화 <스팔타커스>. 1960년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 커크 더글라스,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
아무튼 우리가 복도에서 시위를 하고 고함을 지른 덕분에 보게 된 영화 중 하나가 미국 영화 <스팔타커스>다. 아마 내가 최초로 접한 외국 영화가 아닌가 싶다.

64년에서 66년 사이의 일이니 벌써 거의 40년 전의 일이다. 미국 영화 <스팔타커스>는 대단히 긴 영화임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열중케 하고 압도했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자막을 쫓아가며 영화를 보는데도 시종일관 나를 꼼짝 못하게 한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영화를 보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검투사 스팔타커스 흉내로 한바탕 교실이 시끄러웠던 풍경도 아슴히 떠오른다.

다음날 수학시간이었던가, 선생님이 영화 <스팔타커스>의 수많은 명 장면들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 무엇인지를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런저런 대답이 있었는데, 나는 좀 엉뚱했다. 다른 아이들이 쉽게 동의하지 않는 발언을 했다.

로마의 장군들과 젊은 귀족 여인들이 검투사 노예들의 검투를 보러 검투장으로 왔을 때의 그 도착 장면을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장군들은 말을 타고 왔고, 여인들은 가마를 타고 왔다. 여덟 명의 노예들이 어깨에 멘 화려한 두 채의 가마가 땅에 내려지자, 편히 두 다리를 뻗고 상체를 비스듬히 눕듯이 하고 앉아 있던 화려한 복색의 젊은 여인들이 각기 가마에서 내려서는 장면.

그 장면이 왜 가장 인상적이었느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잊혀졌다가도 영화 <스팔타커스>얘기만 나오면 다시금 맨 먼저 그 장면부터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1970년, 나는 월남 전장에서 또 다시 미국 영화 <스팔타커스>를 볼 수 있었다. 월남에서 내가 있던 곳은 투이호아 근교에 자리잡은 백마부대(육군 제9사단) 예하 도깨비부대(제28연대)였다. 도깨비부대 본부에는 큰 극장이 있었다. 삼 면의 벽이 없는 대신 우람한 시멘콘크리트 기둥들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제법 웅장한 극장이었다.

그 극장에서는 고국 위문단의 공연이 없을 때는 일주일 간격으로 저녁에 영화를 상영하곤 했다. 연대본부의 팔자 좋은 행정병들과 장교들, 근처 209이동 외과병원의 입원 환자(일명 반창고)들과 기간 사병들, 또 연대본부 직할 포대와 전투지원중대의 야간 경계근무에 걸리지 않은 병사들이 주로 와서 영화를 관람했다.

공수기지 1중대의 파견병으로 연대본부 근처 1대대본부에 걸쳐 있던 나도 종종 연대본부 '도깨비극장'으로 걸음을 해서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런 복터진 팔자 덕분에 미국 영화 <스팔타커스>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수년만에 다시, 이제는 월남전에 참전한 전투병이 된 처지에서 보게 된 영화 <스팔타커스>는 내게 좀더 새로운 느낌들을 안겨 주었다. 가마를 멘 노예들, 편안히 가마를 타고 와서 사뿐 내리는 여인들, 검투사 노예들을 고르는 여인들의 눈빛, 검투사 노예들을 고르면서 걸맞지 않게 노예들이 겪는 더위에 동정심을 발휘하는 여인들의 절묘한 자비심 따위, 그런 미세한 장면들에서 나는 다시금 좀더 충격을 받았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내가 지금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월남전에 참전한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전투수당이라는 이름의 돈을 받고 있는 나는 이데올로기와 미국 패권주의의 용병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엄청난 에너지의 분출을 실감시켜주는 노예 반란, 그 반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로마 권력층의 암투와 진압, 허무한 패배 끝에 생존 노예들 모두가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장면 등은 내게 많은 아픔과 생각들을 안겨주었다.

지금은 지구상에 노예제도가 존재하지 않지만, 제도는 없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존속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억압 구조에 의해 능히 노예제도의 실상을 방불케 하는 갖가지 형태의 상황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리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떤 형태가 되었건간에 나 자신이 노예적 상황에 처하거나 그런 상황을 목도하게 되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히 막연한 상념이긴 했지만, 나는 '약자의 정의'도 많이 생각했다. 강자에게보다는 약자 쪽에 사회정의가 더 많이 결집될 수 있다는 모호한 생각도 했다. 내가 그리스도교 신자인 이상,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소망한다면, 나는 늘 강자보다는 약자 편이 되어, 약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 사회의 불평등과 싸우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분명했다.

최근에도 나는 텔레비전에서 미국 영화 <스팔타커스>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30여 년 전 월남에서의 그 날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가톨릭다이제스트> 2003년 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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