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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로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시아버지. 어느 날 말끔한 정신으로 직접 꺾어오신 꽃 두 송이를 손에 쥐어주시고, "큰애야, 너 인생이 뭔지 아니?" 물으시더니 "인생이란 참 좋은거란다" 말씀하셨다. 그러더니 전혀 기억하지 못하던 당신의 딸 얼굴을 알아보며 이름까지 부르셨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운전면허 시험장의 시험관인 남편, 대학생 아들 경의와 함께 살면서 직장에 다니는 손 부인. 빈틈없는 일 처리로 소문이 나있지만 현대화니, 전산화니 하면서 치받고 올라오는 신입 사원들로 마음이 영 불편하다. 그러던 중 믿고 의지하며 살던 시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된 시아버지는 치매 증상을 보이신다.

시아버지는 공군 출신으로, 건장한 몸에 무뚝뚝하며 다른 식구들의 처지는 안중에도 없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큰며느리인 손 부인은 시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어 정이 가질 않는다. 식사를 하고도 잊어버리고, 거리를 배회하며 교통사고를 당할 뻔하기도 하고, 빵 사이에 버터 대신 비누를 끼워 입에 넣기도 하는 시아버지. 결국 치매 진단을 받는다.

이런 저런 핑계로 나 몰라라 하는 시동생 부부, 시댁 걱정을 하며 도망치듯 가버리는 시누이. 시아버지를 모시는 일은 고스란히 맏며느리 손부인의 차지가 된다. 야간 착란(밤에 소동을 피움)과 인물 오인(아들을 도둑으로 생각함), 실금(소변을 참지 못하고 쌈)이 계속되자 시아버지를 요양소에 모시고 간다. 영화에서는 요양소로 번역했지만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노인 주간보호센터'로 낮동안 어르신들이 모여 보호를 받고 여러 프로그램으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시는 곳이다.

처음에 거부감을 보이던 시아버지는 서서히 적응해 가시고, 저녁 6시에 할아버지를 모시러 가는 일은 손자인 경의가 맡는다. 어느 날 경의가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할아버지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되고, 이 일로 '주간보호센터'에서 강제 퇴소 당한다. 더 이상 대책이 없는 식구들은 결국 양로원을 택하게 되지만 그마저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큰아들인 손 부인의 남편은 참 힘들다. 치매 아버지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계속 사고를 치시고, 동생들은 몰라라 하고, 아내는 너무 힘들어서 몸져눕고, 정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부모에 대한 도리라 여기지만 그 어디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사십 인생의 무거운 짐이 다 그 어깨에 올라앉아 있다.

큰며느리 손 부인도 참 힘들다. 직장 생활에, 집안 살림에, 시아버지 병 수발에…. 쭈그리고 앉아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님, 그리워요. 어머님, 너무 힘들어요"하며 흘리는 눈물에 역시 사십 인생의 고달픔과 막막함이 스며 있다.

손자 경의는 어떨까. 역시 참 힘들다. 밤낮없이 사고 수습을 도와야 하고, 저녁 6시면 어김없이 할아버지를 모시러 가야 한다. 잠깐의 실수로 할아버지를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늘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을 접고 할아버지를 모시러 가곤 한다.

경의는 '주간보호센터'에 할아버지를 모시러 가는 것을 친구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는데, 가족의 한 사람으로 맡은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간보호센터'의 추석 잔칫날, 할아버지를 모시고 세 식구 모두 참석한다.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밤길을 걸어 함께 집으로 향하는 네 식구의 뒷모습이 어찌나 따뜻한지, 복지관에서 근무할 때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가족들의 깊은 사연과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던 식구들 사이의 정이 손에 잡히는 것만 같았다.

치매 환자로 인해 가족들의 일상이 흔들리고 모든 일정이 환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세 식구가 그래도 씩씩하게 잘 대응해 나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남편과 아들이 돕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짐을 혼자 짊어진 손 부인이, 시아버지와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면서도 애써 감당해 내고 가끔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관계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었을까.

손 부인에게는 남편과의 소중한 추억들이 있었다. 그 추억으로 두 사람은 마주 웃기도 하며 서로에 대한 처음 마음을 들여다보곤 한다. 남편은 또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그건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어려움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는 그 무엇보다 강한 끈이 되어 그들을 묶어준다.

가족들 중 가장 사이가 나빴던 시아버지와 큰며느리. 신기하게도 치매로 정신을 놓아버린 시아버지는 다른 사람은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유일하게 큰며느리만 기억한다.

양로원으로 간 시아버지가 큰며느리를 보고 '집에 가고 싶다'며 엉엉 울 때, 이미 관계는 관계라는 이름마저 사라지고 존재 자체의 끌어당김과 연민 같은 것으로 녹아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시아버지가 환상으로 본 눈처럼. 그래서 영화의 영어 제목에 다시 한 번 눈길이 간다.

덧붙이는 글 | (여인사십, Summer Snow / 감독 허안화 / 출연 소방방, 교굉, 나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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