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산의 주인 또한 염소입니다.
고라니가 더러 있지만 그 숫자는 방목하는 염소를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특이하게도 보길도의 숲은 울창하고 산열매들도 풍성한데 다람쥐나
청설모, 산토끼 같은 동물들이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산이란 산은 온통 염소들의 차지입니다.
염소가 이 땅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충선왕 때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해서입니다.
염소는 벌써 700여 년을 우리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염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보신용 흑염소 중탕이 건강에 좋다는 정도가 염소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일 겁니다.
더구나 기독교에서 양은 선으로 염소는 악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탓에
염소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염소를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처음 대하는 여행객들은
염소를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염소는 많은 초식동물들처럼 더할 수 없이 순한 동물입니다.
게다가 염소는 다정한 장난꾸러기이기도 합니다.
염소에게도 뿔이라는 무기가 있으나 그것은 평화의 무기입니다.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용 무기일 뿐이지요.
사진: 은주라는 이름의 염소
나는 염소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무엇보다 풀 먹는 법을 가르쳐 준 스승은 염소들입니다.
염소가 먹는 풀은 나도 뜯어먹습니다.
하지만 댓잎은 아무래도 내가 날것으로 먹기에는 질겨서 염소처럼 직접
씹어먹지 못하고 끓여서 차로 마십니다.
요즈음 보길도에 동백꽃이 한창입니다.
염소들은 떨어진 동백꽃도 곧 잘 먹습니다.
염소들이 꽃을 통째로 먹는 데 비해 나는 동백의 꿀만을 빨아먹지요.
그 점에서는 내가 염소보다 동박새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동박새보다 못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동박새는 꿀을 얻는 대가로 동백꽃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수정을 도와주지만
나는 그저 꿀만 얻어먹고 입을 씻을 따름입니다.
세연정 풀밭의 흰염소
묶여있거나 방목되거나 간에 고기로 키워지는 염소의 운명은 애달픕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애달픔이야 존재의 숙명인 것을, 사람인 나 역시 피해갈 수 없는 것을. 나는 그저 염소라는 존재가 고맙기만 합니다. 염소가 없었다면 내가 이 적막한 섬의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오늘도 들판의 염소들에게 말 걸며 반갑게 인사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