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백설공주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착하고 이쁜 백설공주가 사악하고 나쁜 왕비에게 쫓겨나 일곱 난쟁이와 같이 살다 결국 왕자를 만나 행복해진다는 얘기를. 그 얘기에서 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백설공주나 일곱 난쟁이, 왕비가 아닙니다. 제 관심은 바로 '거울'이었죠.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심지어 정신적이고 주관적인 '아름다움'을 판결하는 '절대적인 권위'의 거울. 이야기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은근슬쩍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 바로 거울입니다.
사실 왕비는 거울의 '재물'입니다. 왕비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아야 했죠. 거울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니까요.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으려면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했죠. 그리고 철저하게 스스로를 미화시켜야 했습니다. 얼굴에 솟아오른 뽀드락지마저도 정당화시켜야 했죠. '이건 그 미운 백설공주가 날 저주해서 그런 거야.' 그래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타자를 배제할 뿐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다른 요소를 억압하고 '나쁜 것'으로 몰아세웁니다. 조셉 폰타나는 '유럽'도 왕비처럼 거울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폰타나는 유럽이 자신을 '문명'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야만', '기독교', '봉건제', '악마', '촌뜨기', '궁정', '미개', '진보', '대중'이라는 개념들을 거론합니다. 그리스인들이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명인 대 야만인이라는 거울,
"야만의 거울이라고 하는 왜곡된 표면을 통해 인간을 바라보는 습관은 그 '경계' 너머에도 다른 세계가, 다른 문화가, 심지어는 자기네 것보다 더 우수한 과학과 기술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었"(37∼38)죠. 그리스를 뒤이은 로마 역시 카르타고와 동방민족들의 문화를 철저하게 짓밟았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우수한 문화는 없어져야 했으니까요.
그런 편견이 이어지고 이어져 지금 이슬람에 대한 정형화된 사고방식이 만들어졌습니다. 공격적이고 야만적인 테러리스트 국가. 하지만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뛰어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세시대 유럽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다시 전파해준 곳은 이슬람이었고, 종이와 새로운 작물, 숫자와 건축술도 전파해 주었습니다. 그런 성과는 다 무시되고 편견만 남은 것이지요.
사실 이슬람은 '야만'이라는 이름만이 아니라 '이단'이라는 이름도 가졌습니다. 유럽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죠. 이슬람은 악마의 탈을 '강제로'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유럽은 다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폰타나는 잘 얘기되지 않던 중요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유럽은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희생자를 찾았습니다. 바로 농민입니다. 근대 자본주의에서 농민은 오랫동안 사멸되어야 할 계급으로 몰렸습니다. 농민은 그 오랜 세월동안 이어진 삶의 지혜를 몸으로 품고 있었지만 철저히 무시당했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비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정립될 수 없는 것이라 새로운 계급인 자본가와 노동자의 과학적인 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농민에 대한 묘사는 촌뜨기 아니면 단순무식함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궁정'이라는 아주 고급스런 농민과 상반되는 문화가 출현하게 됩니다. "'궁정 문화'라는 개념은 12세기경 유럽에서 기사들의 '매너', 즉 복장 형태, 음식('고상한 음식'과 '촌스런 음식'이 있었다), 식탁에서의 행동 양식 등을 특징짓기 위해 생겨난 것(194쪽)이었죠. 이런 편견은 유럽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모습 속에도 남아 있습니다.
이런 내부에 대한 억압은 외부에 대한 억압처럼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근대 국가는 전국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강력한 법률과 정책을 행사했습니다. 학교는 체계적으로 국민들을 교육시켰습니다. 표준어가 강요되고 신화화된 역사가 만들어졌습니다. 군대는 사람들의 몸 속에 동일한 논리를 주입했습니다. 이를 어기는 사람들에겐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발전(?)과정은 어느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요즘 말로 '일상의 파시즘'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폰타나도 그것을 지적합니다. 나치즘은 역사 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악몽'이 아니라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던 '참혹한 현실'이었다는 거죠. 다른 사람들, 이교도, 마법사, 시골 사람, 빈민, 이민에 대한 억압은 다른 누군가를 배제해서 자신을 규정하는 '경계'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났다는 거죠. 현실이 비참할수록 사람들은 책임질 누군가를, 자신의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만들어냈다는 거죠.
폰타나는 이런 일상적인 억압을 망각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차별과 편견의 일상적 현실에는 무감각하며, 심지어는 그것이 어느 정도나 우리 문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또 그에 따라 얼마나 우리의 정신적 도구가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사실 이것이 근거를 갖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에 근거한 사고가 아니라 은연중의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가 만들어내는 얼굴에 다름아니다"(231쪽).
| | 소개글 | | | | 글쓴이/ 조셉 폰타나(Josep Fontana): 1931년 에스파니아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 대학, 발렌시아 대학,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아우토노마 대학 등에서 현대사와 경제사를 가르쳤고, 지금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폼페우 파브라 대학 부설 <비벤스 비베스 역사 문제 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절대왕정의 붕괴>(1972), <경제 변화와 정치 행위>(1973), <구체제의 위기>(1979), <역사, 과거의 분석과 사회 계획>(1982), <역사의 종말, 그 이후의 역사>(199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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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타나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도취된 유럽이 불행을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그 불행은 억압에서만 오는 게 아닙니다. 불행은 유럽이 다른 문화와의 '접합'을 통해 발전할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상실'에서도 옵니다. 다른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거죠. 단선적이고 동일한 관점의 형성, 그것은 역사의 비극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문제점은 다들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비극을 희극으로 전환시키려면 어떤 힘이 필요할까요? 저는 그것을 '연대'에서 찾습니다. 나눠지고 쪼개져서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뭉쳐 힘을 되찾는 거죠. 조작된 '적개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이익과 미래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죠. 승자나 영웅을 기다리던 수동성에서 벗어나 약자들이 나서서 힘을 모으는 것이죠.
폰타나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 유럽의 문제와 저개발 국가들의 문제가 함께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만일 우리 자신을 벽 속에 가두어버린다면 우리는 안과 밖 모두로부터 쳐들어오는 공격자들의 손에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럽인들과 유럽 문명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상실한 모든 사회들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인류 역사는 한 장이 끝나고 다른 장이 시작될 것이다"(298쪽).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르고 쪼개져 벽 속에 갇혀 버리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이라크로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우리 손에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특이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거울을 깨트리고 서로 마주보려는 용기를 품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목숨을 지킴으로써 우리도 용기를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이제 곧 외국의 값싼 농산물이 밀고 들어올 것입니다. 땅과 생명을 지키려면 농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분들이 가진 지혜와 꿈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붕괴를 막을 수 있습니다. 가르고 배제하는 편협한 마음에서 벗어나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