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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세의 보험 회사 중역으로 아내와 살고 있는 워렌 슈미트. 영화는 워렌의 정년 퇴직 기념 파티로 시작된다. 평생 몸바쳐 일해온 직장을 떠나는 워렌에게 동료와 친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지만, 파티 도중 벌떡 일어나 이야기하는 친구 레이의 말에 오히려 진실이 담겨있다.

"저 많은 퇴직 선물도, 이런 퇴직 축하 파티도, 노후 보장 연금도 다 소용 없는 것. 의미있는 것은 오로지 의미있게 살아온 삶뿐이다."

퇴직 후 첫 날,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눈은 저절로 떠지고 길고 긴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 아무런 할 일도, 오라고 하는 곳도, 가야할 곳도 없는 워렌은 TV 앞에 앉아 잠들곤 한다. 그나마 규칙적인 일과란 멀리 탄자니아에 사는 여섯 살 엔두구에게 후원자 편지를 쓰는 일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42년 동안 함께 해 온 아내 헬렌이 돌연히 세상을 떠나고 워렌의 생활은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영화는 워렌이 혼자 하는 여행과 결혼을 앞둔 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쓰는 과정을 재미있게 그러나 때로 눈물겹게 그려나간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면서 건실하게 가정을 꾸려왔지만 노년을 함께 보낼 아내는 갑자기 떠나버리고, 하나 밖에 없는 딸은 '언제부터 내게 그렇게 관심이 있었느냐'며 부담스러워 하고 냉랭하게 군다. 딸에게는 여전히 심술궂고 인색한 아빠로 남아 있다. 딸에게 가려고 캠핑카를 몰고 길을 떠난 워렌, 그러나 딸에게 거절당하자 방향을 바꿔 자신이 태어난 곳과 졸업한 대학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 어느 곳도 옛날의 그 곳이 아니며, 마음을 털어놓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긴 여행길에서 워렌은 자신의 슬픔 안에 숨겨져 있는 분노와 두려움, 외로움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하늘에 있는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아내에게 화가 났던 자신의 마음을 풀기도 한다.

'정년 퇴직, 배부른 소리지. 정년을 채우기는커녕 조기 퇴직 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실정인데…' 우리가 흔히 듣는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낡았지만 커다란 집을 한 채 가지고 있고, 생활에 필요한 연금이 보장되는 워렌의 외로움과 할 일 없음은 차라리 배부른 고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이 밥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 워렌의 주름진 얼굴과 느린 걸음, 구부정한 어깨, 휘어진 다리는 갈 곳 몰라하는 노년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 20년 전이었을까. 아버지 역시 정년 퇴직으로 내가 눈을 떠보면 출근하는 대신 늘 마당에 있는 나무에 물을 주고 계셨다. 81세이신 지금의 건강과 활동적인 모습에 비춰보면 60이셨던 그 때 얼마나 팔팔하고 생기있으셨을까. 3남매 먹이고 가르치느라 모아놓은 돈도 없고, 한 명도 결혼시키지 않은데다가 막내인 나는 대학생이었으니 얼마나 막막하셨을까. 워렌의 힘없이 축 쳐진 어깨에서 아버지를 본다.

그러면서 동시에 앞으로 퇴직을 경험하게 될 남편의 얼굴을 겹쳐본다. 워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바깥 생활에 익숙한 몸으로 집안 어디인들 자기 자리 같을까. 이미 그 때쯤이면 아이들 다 자라 곁을 떠나버릴테고, 둘이 같이 의지하며 노년을 보내자던 나마저 먼저 세상 떠나고 없다면 혼자 남은 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 반대로 나 혼자 남게 되면 나는 또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크림을 듬뿍 발라 얼굴의 화장을 닦아내던 아내를 생각하며, 워렌은 어느 날 자신의 얼굴에 그 화장품을 듬뿍 발라 문지른다. 그 때 흐르는 눈물. 사람의 떠남과 부재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나며 되살아나는 것. 그래서 무덤덤하지만 일상을 나누며 살아가는 부부가 그토록 귀한 인연일까.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면서도 영화는 노년의 일상을 천천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어서, 우리들 잠시 후 노년의 모습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아무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 인생이었다고, 이제 죽는 일밖에는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워렌에게 저 멀리 탄자니아의 작은 아이 엔두구는 그림 편지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홀로 남은 워렌에게 손을 내민 것은 저 먼 나라의 엔두구이다. 이렇게 인생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흘러 가면서도 그 갈피에 숨어있는 작은 만남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늦은 밤 지하철에서 내려 역을 빠져 나오니 남편이 저만치에 서있다. 남편의 주머니에 슬쩍 손을 집어 넣으니 두툼하고 따뜻한 손이 잡힌다. 멋지고 화려한 사건들이 아니라 지금의 작은 일상을 이어나가면서 노년의 삶을 같이 꿈꿀 짝이 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워렌의 삶을 통해 씁쓸하고 슬프지만 그래도 스스로 살아나가야 하는 노년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둘 다 혼자 남아도 씩씩하게 잘 살려면 노년 준비 잘해야 하는데…'

(어바웃 슈미트, About Schmidt / 감독 알렉산더 페인 / 출연 잭 니콜슨 , 캐시 베이츠 , 더모트 멀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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