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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이 시작되는 마당에 참으로 거북살스럽지만 촌지이야기를 먼저하자. 학교현장에 촌지를 거부하는 동료들이 늘어가고 촌지 문제가 많이 준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멀었다고 느끼는 학부모들도 있는 것 같다.

학부모가 촌지를 들고 간다면 그 이유는 다음 중 하나일 것이다. 내 아이가 불이익을 받을까봐 들고 가거나,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담임 교사를 더 힘들게 하니까 미안해서 들고 가거나, 내 아이에게 시선 한번이라도 더 달라는 바램으로 들고 가거나, 정말 고마워서 말뜻 그대로 촌지(寸志)로 들고 갈 것이다.

이런 이유들이 정당한지 따져보자. 다른 학부모는 들고 가는데 '나만 안 가면 아이가 손해 보지 않을까' 생각해서 들고 간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이며, 얼마나 큰 모순인가? 들고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들고 갈 것인가? 그렇다면 이 '게임'은 끝이 없다.

아이가 좀 특별해도 특수학교에 보낼 정도가 아니라면 초등학교에서 가르칠 의무가 있다. 초등교육은 의무교육이다. 촌지로 해결해야할 일은 아니다.

내 아이 잘 봐달라고 들고 가는 것은 생각 없는 짓이다. 이런 학부모는 나중에 아이를 군대 안 보내려고 돈 쓰지 않을까? 이렇게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원칙을 지키며 살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가 담임 교사를 잘 만나 바람직한 변화를 보이며 학교 생활을 즐거워한다면 고맙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촌지 들고 갈 이유는 아니다. 교사는 아이들이 바람직한 변화를 보이도록 직무를 수행해야 하며, 그 대가로 봉급을 받는다. 만약 교사의 봉급이 적다고 생각한다면 교사처우를 개선하라고 정부에 요구할 일이지 촌지 들고 갈 일이 절대 아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도 학부모가 촌지 들고 학교에 갈 이유는 되지 않는다. 촌지를 정당화 시켜주는 어떤 논리도 없다. 촌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학부모가 아직도 있다면 공개적으로 들고 가야 할 것이다. 교사와 학부모 사이는 공적 관계다. 공적 관계라면 투명해야한다.

이제 교사가 촌지를 거절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오래 전에 나도 촌지를 받은 부끄러운 경험이 있는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은 헛수고였다.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촌지를 버리고 자유를 택했다.

자유롭지 못한 교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후배 교사에게 들은 말이다. 자신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질문하고 책읽기도 앉은 순서대로 시킨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에게 '편애'의 오해를 받기 싫어 그렇게 한다고 했다.

이건 매우 비교육적인 방법이다. 성취감이 필요한 아이도 있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야 할 아이도 있는데 순서가 정해져 있으면 아이들에게 적절한 질문을 할 수 없다. 아이가 어려운 질문에 좌절할 수도 있고, 너무 쉬워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또, 아이들은 자신의 차례가 아니면 질문이나 읽는 책의 내용에 긴장감이 떨어지므로 밀도 높은 수업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촌지는 교사의 교수능력을 떨어뜨린다.

교사가 촌지를 거부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학부모들을 편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교사가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한다고 믿는 학부모는 마음이 편할 것이다. 이것은 국가공무원으로서(공립학교 교사는 공무원이다) 국민에 대한 의무이고, 교사로서 학부모에 대한 의무이다.

중고생 시절 좋아하는 선생님의 과목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부모가 선생님을 신뢰하면 아이는 선생님을 좋아한다. 교사를 좋아하게 되면 학교 생활이 즐겁고, 학교생활이 즐거우면 학습성과가 좋아진다. 부모가 불신하는 교사를 아이가 좋아하기는 어렵다. 교사에 대한 믿음은 교사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위해,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 이것이 교사가 촌지를 받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이유다.

이제 학부모들이 들고 가는 화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초등학교 교실의 화분은 보통 학부모들이 마련한다. 3월이면 학급 아이들 전체를 위한 것이라고 여겨 쉽게 들고 가며 많은 교사들도 문제의식 없이 받아 놓는다.

교실의 화분을 치우라고 해서 법석을 떤 일이 있었다. 화분문제로 민원을 접수한 교육청이 학교로 연락한 것이었다. 학부모에게서 화분을 받아 놓는 것이 정당하면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를 이해시켰어야 하고, 부당하면 민원과 상관없이 금했어야 했다.

지금은 학부모가 원한다면 공식적으로 화분을 기증하는 절차가 마련되어 있기는 하다. 화분을 기탁서와 함께 서무실(행정실)에 접수시키면 된다. 아무리 작은 물건도 기탁하려면 접수를 하고 학교는 이것을 교육청에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나는 화분이 서무실에 접수되어 교실로 배치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학교 교실에 있는 화분들은 규정을 어긴 것들이다.

나는 화분을 받아놓지 않는다. 그 이유는 화분을 들고 오지 못하는 학부모들에 대한 배려이다. 화분을 들고 오지 못하는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다른 학부모가 가져다 놓은 화분으로 꾸며진 교실보다는 좀 삭막해도 화분 없는 교실에서 공부하기를 원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사실 학부모들이 교실에 놓을 화분을 사들고 가지 않아도 된다. 교사가 아이들과 씨앗을 심어 가꾸면 되고, 필요하면 학교에 요구하면 된다. 나는 지난해 학교에 화분을 요구했고 학교는 즉시 구입해주었다. 내가 일하는 학교만 특별히 화분 살 예산이 배정 된 것 아니다. 담임교사가 요구하면 사주게 되어있다. 어쨌든 학부모가 들고 갈 필요 없다는 말이다. 이번 3월에는 학부모들이 화분 들고 교실을 찾는 풍경이 사라지면 좋겠다.

이제 학부모가 들고 가도 좋은 선물을 이야기하자. 교사로서 학부모들에게 기분 좋게 받은 선물이 있다. 2001학년도에 1학년을 담임했는데 병윤이가 학기 중에 전학을 갔다. 전학 가는 날 병윤이 어머니는 내게 큰 선물을 주었다.

"첫 아이를 입학시키며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여러 사람에게 간증했습니다."

자랑 같아 낯뜨겁지만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었다.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내게 없음을 안다. 병윤이가 누구에게나 잘 적응하는 성격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한 마디는 '내게 힘을 주는' 너무 귀한 선물이었다.

나는 학부모들에게서 받은 이메일이나 편지들을 갈무리한다. 세상사람들 모두 교사를 무시할 때도, 학교 현장의 갖가지 모순에 실망할 때도, 내 능력의 한계에 좌절감을 느낄 때도 나는 그 귀한 '선물'들을 다시 읽으며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교단 교사는 자존심과 긍지로 버티는 사람들이다. 학부모는 교사의 자존심과 긍지를 세우는 선물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촌지는 교사의 자존심을 짓밟는다. 화분을 들고 가는 것도 문제가 있다. 교사의 자존심과 긍지를 세우는 한 마디의 말을 들고 학교에 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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